▲무슨 일이든 돈만 된다면 마다치 않고 달려들었던 나의 스무 살은 그렇게 시작됐다. 집에서는 등록금을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다며 만류했지만, 현실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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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든 돈만 된다면 마다치 않고 달려들었던 나의 스무 살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길로 고향인 여수로 내려갔다. 집에서는 등록금을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다며 만류했지만, 현실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여천공단 플랜트 공사 현장의 일당 막노동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일당'이 문제였다. 용역업체는 어린 초보자임을 고려해 용접이나 판축(담장 쌓는 일) 일을 권했다.
그러나 기껏 1~2만 원의 조공('데모도'라고 불리는 조수) 일당을 받고 싶지 않았다. 단기간에 큰돈을 벌려면 무조건 단가가 높아야 했다. 초보자도 가능하고 일당 단가도 3만 원 이상을 받는 '질 좋은 일자리', 그것은 바로 '탱크 청소'였다.
투입된 현장은 정유회사 보수공사장이었다. 말이 탱크 청소지, 탱크를 새로 만드는 공정이나 다름없었다. 철제탱크 내부로 들어가 내벽의 낡은 코팅제를 벗겨 내고 새롭게 코팅제를 도포하는 작업이었다. 주어진 유일한 작업용 도구는 달랑 전동연마기 1개가 전부였다. 1평도 안 되는 공간에 두 명이 함께 들어가 코팅제를 벗겨 내고 긁어내는 작업이었다.
탱크의 작은 입구를 통해 몸을 겨우 밀어 넣어 들어가면 일단 숨을 쉬기 힘들었다. 무더위가 오기 전인 6월이었지만 땀은 비가 오듯 주르륵 흘렀다. 분진 배출을 위해 환풍기를 가동했지만, 신선한 공기가 공급되지 않아 질식사고는 흔한 일이었다. 오히려 연마기에 의해 벗겨져 튀어 오르는 코팅제 파편은 참을 수 있었다. 파편과 분진이 가득한 밀폐 탱크 안에서 숨을 참아가며 벽을 문지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내가 이 일을 하기 전까지는 지옥을 믿지 않았지만, 이 인생 최대의 극한 노동으로 이미 지옥을 맛보고도 남았다. 30년보다 더 길었던 30일. 탱크에서도 집에서도 심지어는 꿈속에서까지 그놈의 파편과 분진이 나를 따라다녔다.
일을 마치고 세수를 할 때마다 눈코입은 물론 귀에서까지 분진이 섞인 시커먼 가루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씻어내도 계속 나왔다. 일을 마치면 일꾼을 감독하는 십장이 삼겹살을 사줬던 이유가 다 있었다. 함께 일했던 30대 아저씨는 3일 후 나타나지 않았다. 일을 못 하겠다며 포기하고 다른 작업장에 투입됐다. 극한 작업인 만큼 이런 경우는 아주 흔했다. 이후 탱크 작업은 나에게 모두 맡겨졌고 일당도 1만 원이나 더 올랐다.
그렇게 2학기 등록금을 마련했다. 앞으로는 내가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내 손으로 처음 받아든 등록금 영수증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런 막노동을 하려고 민주화를 향한 동참을 외면했다는 자책보다는, '세상에 좋은 일'로 돈을 벌었다며 나를 스스로 위로하기 바빴다.
그렇게 내가 현실에서 도피하며 막노동을 하는 사이, 학우들의 피눈물이 나는 노력으로 국가는 시국 수습선언을 발표했고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까지 이뤄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청년의 사명감 잊지 말아달라'는 약속
그해 겨울, 친구 따라 이웃 대학에 갔다가 우연히 윤선애(서울대 84학번)씨의 무대를 보았다. 참으로 절절한 무대였다. 단아한 체구에 비음 섞인 선동적 성량과 애끓는 음색으로 불렀던 이한열 열사의 추모곡 <벗이여 해방이 온다>는 온 가슴에 전율로 다가왔다. 마치 한동안 현실을 회피하고 안전한 길을 좇았던 나에게 결코 청년의 사명감을 잃지 말고 살라는 숙제를 안겨주는 듯했다.
33년이 지난 지금,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스무 살 시절 경험한 극한알바를 떠올리곤 한다. 현실과 타협하고 이 자리에 쉽게 안주해 버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항상 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하자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나저나 "그대 뒤를 따르리니"라며 울림을 준 윤선애 누님은 요즘 무엇 하고 계시나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파마 스타일은 좀 바뀌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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