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 선생주시경 선생
한글학회
주시경은 『독립신문』에 기명으로 몇 편의 글을 썼다.
다음은 제47호와 제48호에 같은 제목으로 쓴 글이다.
사람들이 사는 땅덩이 위 다섯 큰 부주 안에 있는 나라들이, 제가끔 본토 말이 있고 제가끔 본국 글자들이 있어서 각기 말과 일을 기록하고, 혹간 말과 글자가 남의 나라와 같은 나라도 있는데, 그 중에 말하는 음대로 일을 기록하여 표하는 글자도 있고, '무슨 말은 무슨 표'라고 그려 놓는 글자도 있는지라.
글자라 하는 것은 단지 말과 일을 표하는 것이라, 말을 말로 표하는 것은 다시 말하잘 것이 없거니와, 일을 표하자면 그 일의 사연을 자세히 말로 이야기를 하여야 될지라. 그 이야기를 기록하면 곧 말이니, 이런 고로 말하는 것을 표로 모아 기록하여 놓은 것이나 표로 모아 기록하여 놓은 것을 입으로 읽는 것이나 말에 마디와 토가 분명하고 서로 음이 똑 같아야, 이것이 참 글자요, 무슨 말은 무슨 표라고 그려 놓는 것은 그 표에 움직이는 토나 형용하는 토나 또 다른 여러 가지 토들이 없고, 또 음이 말하는 것과 같지 못하니, 이것은 꼭 '그림'이라고 이름하여야 옳고 '글자'라 하는 것은 아주 아니 될 말이라.
또, 이 두 가지 글자들 중에 배우기와 쓰기에 어렵고 쉬운 것을 비교하여 말하면, 음을 좇아 쓰게 만드는 글자는 자ㆍ모음('모음'이란 것은 소리가 나가는 것이오, '자음'이란 것은 소리는 아니 나가되 모음을 합하면 모음의 도움으로 인하여 분간이 있게 소리가 나가는 것이라)에 분간되는 것만 각각 표하여 만들어 놓으면 그 후에는 말을 하는 음이 돌아가는 대로 따라 모아 쓰나니, 이러함으로 자연히 글자 수가 적고 무리가 있어 배우기가 쉬우며, 글자가 몇이 안 되는 고로 획수를 적게 만들어 쓰기도 쉬우니,
이렇게 글자들을 만들어 쓰는 것은 참 의사와 규모와 학문이 있는 일이오, 무슨 말은 무슨 표라고 그려 놓는 것은 물건의 이름과 말하는 것마다 각각 표를 만들자 한즉 자연히 표들이 몇 만개가 되고, 또 몇 만 개 표의 모양을 다 다르게 그리자 한즉 자연히 획수가 많아져서 이 몇 만 가지 그림들을 다 배우자 하면 몇 해 동안 애를 써야 하겠고,
또 획수들이 많은 고로 쓰기가 더디고 거북할뿐더러, 이 그림들의 어떠한 것이 이름진 말 표인지 움직이는 말 표인지 알 수가 없고 또 잊어버리기가 쉬우니, 이는 때〔시간〕를 공연히 허비하고 애〔노력〕를 공연히 쓰자 하는 것이니, 참 지각 없고 미련하기가 짝이 없는 일이라.
옛적 유럽 속에 있던 패니키아란 나라에서 만든 글자들은, 자ㆍ모음을 합하여 스물 여섯 자로되, 사람들의 말하는 음들은 다 갖추었는 고로, 어떤 나라 말의 음이든지 기록하지 못할 것이 없고, 또 쓰기가 쉬움으로 인하여, 지금 문명한 유럽 속의 여러 나라들과 아메리카 속의 여러 나라들이 다 이 글자로 제 나라 말의 음을 좇아 기록하여 쓰는지라.
조선 글자가 페니키아에서 만든 글자보다 더 유조하고 규모가 있게 된 것은, 자ㆍ모음을 아주 합하여 만들었고, 단지 받침만 때에 따라 넣고 아니 넣기를 음의 돌아가는 대로 쓰나니, 페니키아 글자 모양으로 자ㆍ모음을 옳게 모아 쓰려는 수고가 없고, 또 글자의 자ㆍ모음을 합하여 만든 것이 격식과 문리가 더 있어 배우기가 더욱 쉬우니, 우리 생각에는 조선 글자가 세계에서 제일 좋고 학문이 있는 글자로 여겨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