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군 장교 시절의 박정희
자료사진
일본군 장교
박정희의 괴뢰만주군(곧 일본군) 장교생활은 8개월도 되지 않아 일본의 패전으로 끝났다. 갑작스러운 일본의 패전으로 박정희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그는 베이징을 거쳐 1946년 5월 8일 초라한 일군 패잔병 몰골로 귀향했다.
긴 칼을 차고 일본 육사로 떠날 때는 고향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송했다. 하지만 해방 후 귀향 때는 밀짚모자에 헌 지까다비(일본군 작업화)를 신은 초췌한 몰골로 보는 이들의 냉소를 자아냈다. 그러자 형 박상희조차도 면박을 줬다.
"교사로 지낼 것이 왜 씰데없는 만주로 가서 거지가 돼 돌아왔냐?"
박정희는 다시 교사가 되고자 옛 스승(배 아무개 교장)을 찾아갔다. 그는 박정희를 보고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친일을 했기에..."
박정희는 말없이 자리를 떴다. 그는 속으로 뇌까렸다.
'자기도 친일하면서 그 자리를 유지해 놓고는…'
그 교장은 측은히 뒤돌아서는 박정희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도 학무국에 가서 알아보게."
그야말로 오십 보 도망친 자가 백 보 도망친 자를 비겁자라고 탓하는 격이 아닐까. 박정희는 고향에 머무는 4개월 남짓 동안 술에 절어 살았다. 이따금 대구로 가서 친구들도 만났다. 하지만 왠지 교단에 복직하기는 싫었다. 그런 차 미군정에서 남조선경비사관학교를 창설했다는 모집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런데 서울로 가는 여비가 없었다. 마침 큰 누님 집 선반 위에 상희 형님의 카메라가 보였다.
"누님, 나 이것 가지고 갈 테니 형님한테는 내가 기차를 탄 뒤에 이야기하세요."
1946년 9월 24일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그로서는 세 번째 사관학교 입교였다.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후일 그의 저승사자였던 동향 선산 출신의 김재규와 같이 상경하여 동기생으로 입교했다. 3개월 교육과정을 수료한 뒤 30세의 나이에 국군 육군 소위로 다시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
첫 부임지는 춘천 8연대였다. 연대 단위 기동훈련을 초안한 공로를 크게 인정받아 중위 계급을 건너 뛴 대위로 진급하는 행운도 누렸다. 하지만 그 행운은 잠깐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발했다. 이 사건 진압되자 군은 곧 군 내부 남로당원 색출작업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당시 육사교관이던 박정희는 남로당 핵심인물로 지목됐다.
박정희가 왜 남로당에 연루됐는지 그에 관한 정설은 아직도 분명치 않다. 셋째 형 박상희의 피살 때문이라든지, 해방 직후 혼란기의 보신책이라든지... 혹자는 그 무렵 한반도의 운명이 어느 쪽으로 기울든 그는 어떻게든지 살아남겠다는 양다리를 걸친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군 수사기관에 체포돼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남로당 군사책 조직도 죄다 불었다. 그는 그와 같은 대담한 배신과 전향으로 사형 구형에 무기 선고로, 10년 감형에 다시 형집행 정지의 혜택을 받고 풀려났다.
만군 인맥이었던 백선엽의 선처로 육군 정보국 문관에 특채됐다. 문관 재직 중 6.25 전쟁 발발로 현역에 복귀했다. 한국전쟁은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다시 군인의 길을 걷게 됐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