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1876-1914)
독립기념관
1905년의 을사늑변 이후 대한제국의 운명은 시한부 인생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
통감부는 1906년 8월 이른바 학제개혁이란 구실로 사범학교령, 고등학교령, 외국어학교령, 보통학교령을 잇따라 공포하면서, 보통학교의 교감과 중등학교의 학감을 일본인이 맡도록 규정하였다. 일제가 조선의 교육문제에 어떻게 주시해 왔는지에 대한 해답이다.
병탄을 앞두고 통감부는 한국 청소년의 교육제도를 일본식으로 바꾸고 교감과 학감에게 실권을 주면서 조선의 얼을 빼앗고자 서둘렀다. 이를 내다보면서 주시경은 여러 해 전부터 정부에 국문연구 기관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주시경은 『독립신문』안에 국문철자법의 통일을 목적으로 '국문동식회'를 마련한 이래 줄기차게 정부에 국문연구소의 설치를 건의해왔던 것이다.
위기가 닥치자 정부는 뒤늦은 1907년 7월 8일 '대한제국학부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고 주시경을 7월 12일자로 국문연구소 칙임위원(勅任委員)에 위촉하였다. '칙임'이란 대신의 주청으로 임금이 임명하는 고등관 1, 2등의 벼슬아치를 일컫는다.
국문연구소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정음청이 설치된 이후 한글을 연구하기 위한 최초의 국가기관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개설 당시 위원장에는 학무국장 윤치오, 위원으로 학부 편집국장 장한식, 한성법어학교 교장 이능화, 내부 서기관 권보상, 그리고 주시경과 현은, 학부 사무관이었던 일본인 우세무라였다. 이후에 이석ㆍ윤돈구ㆍ송기용ㆍ이종일ㆍ유필근ㆍ이민응ㆍ지석영 등이 위원으로 위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