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1만여 진주의병, 2개월 진주관찰부 점령
1896년 2월 19일(음력 1월 7일), 당시 한성‧평양‧대구와 더불어 4대 도시 중의 하나였고, 21군을 관할하던 진주가 의병 수중에 들어갔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상대로 1년 이상 버텼던 진주성은 '촉석성'으로 불리는 내성과 이를 감싸고 있는 외성으로 구축되어 있어서 과히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일컬었고, 불과 1년 전 조선의 13도를 23개 관찰부로 개편되기 전에는 경상우도의 수부(首府)로서 그 위용을 자랑하던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문루에 의병의 깃발이 꽂힌 것이었다.
그것도 진주로부터 170여 리 떨어진 안의(현 함양군 속면)의 의병들을 이끈 노응규(盧應奎, 1861~1907)가 진주부를 점령했다는 소식은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 신문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에도 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이었다.
노응규가 거의한 지 나흘째 되던 2월 23일(음력 1월 11일), 진주에서 정한용(鄭漢鎔, 1866~1935)이 유학자 정재규(鄭載圭), 전 군수 권봉희(權鳳熙), 전 찰방 오종근(吳鍾根)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진주성은 의병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 후 진주‧사천‧고성의 의병들이 더욱 모여들어 그 수가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또 의병들이 충의의 마음으로 뭉쳤던 까닭에 관군은 물론, 현재 경상남도 일원에는 단 한 명의 일본군경이 발을 붙일 수가 없어서 부왜인들을 정탐꾼으로 보내어 당시 상황을 파악했는데,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진주‧사천‧고성 세 고을의 의병수가 1만여 명이며, 구포에 있는 우리 수비대의 습격설은 물론, 부산의 거류민 습격설이 자주 전해져서 우리 측을 크게 당황하게 하였다. 또 김해 등지에서는 수차에 걸쳐 우리 수비대와 전투를 벌여 쌍방이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2개월 뒤 국왕은 선유사를 보내어 '의병해산'을 종용하였다. 국모의 원수를 갚고, 난신적자를 처단한 후 국왕을 대궐로 모시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창의했고, 창의한 지 10여 일만에 밀조까지 받았지만,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것이 어명인지라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주의병을 자진해산한 날이 4월 19일(음력 3월 7일)이었으니 의병을 일으켜서 진주부를 점령한 지 꼭 2개월 만이었고, 이는 한말의병사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진주 3‧1만세의거
진주 3‧1만세의거 상황은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 되기 전 임시정부 사료조사위원으로서 3‧1만세의거 사료를 정리해서 국제연맹에 보고한 자료를 바탕으로 기록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나타나 있다.
진주에서는 3‧1만세의거 때 17차례, 2만 8000여 명이 참여하여 42명이 순국하고, 150명이 부상했으며, 242명이 투옥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경상남북도에서 가장 많은 횟수와 인원이었다.
조국광복을 위한 노력
3‧1만세의거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순국하자 경남 출신 광복지사들은 조국 광복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러시아 등지로 가서 임시정부나 독립군(광복군)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밀양‧의령‧진주 출신은 의열단에 가입한 지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3‧1만세의거 때 투옥되어 고초를 겪은 다수의 지사들도 국내외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애썼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밀양 출신 김원봉(金元鳳)‧김대지(金大池)‧김상윤(金相潤)‧윤세주(尹世胄)‧황상규(黃尙奎) 등의 의열단, 박진환(朴進煥)을 비롯한 봉양학교‧광림학교‧진주공립농업학교 졸업생들이 신간회 진주지부를 결성하여 반일운동을 펼쳤으며, 의령3‧1만세의거 주도자로 2년 옥고를 겪은 후 중국으로 가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4년 동안 고초를 당한 구여순(具汝淳), 북만주에 발해농장을 건설했던 안희제(安熙濟) 선생도 의령 출신이었다.
이들의 활동을 하는 데 밀양・의령・진주의 사람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뒷받침을 해준 사실이 독립운동사에 나타나 있다.
진주 지수면 두 가문의 적선
반민특위가 해체된 후 반민족자 관련 서류가 대법원으로 이관된 직후인 1949년 10월 27일, 인민군 복장을 한 불순분자들이 진주법원을 방화하고, 2시간 가량 "인민군 만세"를 외치고 돌아다녔다.
1925년까지 부산‧울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도청이 진주에 있었기에 한말 경남지방재판소가 진주에 있었고, 수많은 의병과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의 3‧1만세의거 관련자 재판기록은 진주법원에 있었는데, 그것이 불타버린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주 출신은 62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진주3‧1만세의거 주도자로 1년6월 옥고를 겪었던 이강우(李康雨) 지사는 광복 후 진주에서 무소속으로 초대 민의원이 되었고, 밀양의 김상윤 지사의 집안에서 국회의원이 나오기도 했지만,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후손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이어 가난이 대물림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지사를 도왔던 밀양‧의령‧진주의 나라 위한 적선지가는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가문으로 진주군(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능성 구씨(綾城具氏)와 김해 허씨(金海許氏) 문중을 들 수 있다.
경술국치 후 지수면 승산리 상동마을에는 만회(晩悔) 구연호(具然鎬, 1861-1940) 선생이 살고 있었다. 만회 선생은 188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첫 벼슬이 승정원 가주서(정7품)를 거쳐 승문원 부정자, 성균관 전적, 홍문관 교리, 1891년 사헌부 장령, 1901년 황태자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홍문관 시독(정3품)을 지낸 유학자이자 고관 출신이었다.
그리고 승산리 하동마을에는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 1844~1932) 선생이 살고 있었다. 지신정 선생은 1891년 진사시를 거쳐 1902년 중추원의관, 1904년 비서원 승(정3품)을 지낸 분이었다.
김해 허씨 문중은 대대로 부호였는데 비해 구씨 문중은 대과급제를 한 후 20여 년 동안 벼슬을 청요직(淸要職)에 있었고, 대대로 살림살이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진주에서 만석꾼으로 널리 소문이 났던 지신정 선생의 아들 효주(曉州) 허만정(許萬正, 1897~1952)은 1920년 진주에 사립중등학교 설립자금 50만원 중, 10만원(약 1만석 쌀값)을 쾌척한 반면, 만회 구연호 선생의 아들 춘강(春崗) 구재서(具再書, 1886~1956)는 유학을 숭상한 가문이었지만 경술국치 후에는 그의 아들 연암(蓮庵) 구인회(具仁會, 1907~1969)와 함께 진주에서 포목점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연암은 지수보통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경성(서울)로 가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중앙고보에 입학, 2년 수료 후 1928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청년들을 설득,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여 일본인 상점보다 싼 값에 공동구매해 이익을 얻었다. 이듬해 이사장으로 선출된 그는 작은 가게로 시작한 조합이 3년 사이에 광목과 비단을 다룰 정도로 성장하고, 또한 동아일보 진주지국장이 되어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시대 상황에 따른 정세 변화를 읽는 안목을 키워 마침내 진주 번화가에 포목점을 차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연암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종자돈 2000원과 자신이 동아일보지국장을 하며 번 돈, 큰집 양자로 간 동생 철회(哲會)가 보탠 것을 합쳐 당시 진주의 번화가였던 식산은행 근처에 포목점을 차린 것이 1931년 7월이었고, 일손이 부족해질 정도로 장사가 잘되자 아버지 구재서도 가게에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듬해 뜻밖의 손님이 찾아들었다. 먼 친척인 일정(一丁) 구여순(具汝淳, 1892~1946) 선생이었다. 그는 의령3‧1만세의거를 주도한 혐의로 피체되어 2년여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1922년 상해로 가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만나, 이듬해 8월 입단하고 12월에 조선총독부 요인 암살과 중요 관서를 파괴할 목적으로 동지들과 국내에 잠입하여 제3차 의열단의거를 꾀하다가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여 고초를 겪고 1928년 출옥하여 의령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은 터였다.
당시 '이봉창‧윤봉길 의거'로 인하여 임시정부의 양대 의열투쟁은 민족적 쾌거로 여기고 있던 터였는데, 일정 선생은 임시정부 지원금을 요청하였다. 춘강 선생은 부친 만회 선생께 이를 고하고, 거금 5000원(약 500석 쌀값)을 내놓았다.
"(구여순은) 1922년 형기를 마치고 상하이로 망명하고 그 후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 기도하여 의열단을 가입하였다. 1924년 의열단의 일인 요인 암살계획이 탄로되자 평양에서 검거되어 주동 인물로 최고형인 4년을 언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28년 형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체류하던 중, 김용호(金鎔浩)의 애국심에 감동하여 다시 반제국지방단부(反帝國地方團部)를 조치하여 위원이 되었다. 이후 지방 부호들을 만나 군자금 모집에 힘쓰는 한편 진주 지수면 구재서(具再書) [구인회(具仁會)부친] 등으로부터 일화(日貨) 5천원을 받아 김구 선생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312쪽).
그뿐만 아니었다. 1942년 7월 북간도에서 발해농장(渤海農場)을 운영하던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 선생이 연암 구인회 사장을 몰래 찾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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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인회 상점이 있었던 진주 중앙시장의 모습 ⓒ 이태룡
백산의 사촌형 수파(守坡) 안효제(安孝濟)는 조부 만회 선생과 같은 해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함께 청요직을 지낸 사이로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터인 데다가 처가 지신정 선생과 1914년부터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운영했던 적이 있어 잘 아는 사이였다.
20여 년 만에 불쑥 나타난 백산이 발해농장과 대종교 계열의 학교 운영에 필요한 자금이 부족함을 호소하자 연암은 '당할 때 당하더라도, 풍찬노숙을 하며 겨레를 살리고, 나라를 되찾는 지사들에게 힘을 보태는 것은 당연하다'며 1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물가가 다소 올랐지만 10여 년 전 부친이 일정 선생을 통하여 임시정부에 보내준 500석치 쌀값에 해당하는 거금이었으니, 구씨 가문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은 금전은 드러난 것만 1000석치 쌀값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독립군 단체를 돕기 위해 광복지사들이 비밀리 모금하다가 그 사실이 드러난 경우 적은 돈을 제공한 사람까지 고초를 겪고 옥살이를 했던 터여서 임시정부에 거금을 제공한다는 것은 자신의 투옥은 물론 가문의 몰락까지 각오해야 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광복 후에도 계속되는 두 가문의 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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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만정, 진주의 중학교(고보) 설립을 위해 자금 10만원 쾌척 기사(매일신보, 1920. 05.08) ⓒ 이태룡
1919년 3‧1만세의거 후 민족지도자를 기르기로 결심한 효주 허만정 선생은 논 3만 3000평, 밭 470평, 대지 등을 매각하여 10만원을 마련하고, 뜻을 같이하는 10여 명의 동지들과 진주고등보통학교(진주고보) 설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사립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진주여고 전신) 설립으로 변경되어 1925년 개교할 수 있었고, 가난한 이웃을 돕고, 지역사회를 위해 선행을 계속해 옴에 지수면 승내리에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그 공덕을 기리는 불망비가 두 번이나 세워졌다.
효주 선생의 다섯째 아들인 승산(勝山) 허완구(許完九, 1936~2017) 회장은 선대의 유지를 이어 진주여고를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승산 선생은 1986년부터 매년 장학생을 선발해 34년 동안 1000여 명에게 장학금 약 11억 원을 주었고, 선친의 호를 딴 '효주기념관'을 건립하여 생활관교육과 음악교육 등 다양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도록 했으며, 1991년에는 사비 100억 원을 들여 지금의 진주여고 교사를 신축했다.
LG 가문은 인재육성과 과학기술 진흥이라는 연암 구인회 선생의 뜻을 받들어 1973년 그의 아들 구자경(具滋暻, 1925~2019) 회장이 학교법인 연암학원을 설립하고, 진주에 연암공과대학을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길러오고 있고, 진주시민을 위해 연암도서관을 세웠다.
그리고 LG 가문의 독립운동정신의 특징은 현재까지도 그 얼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현충시설 개보수 사업이다. LG하우시스는 구씨 가문의 정신을 이어 받아 2015년부터 현충시설 개보수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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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G하우시스가 개보수한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 이태룡
지금까지 충칭 임시정부 청사, 매헌윤봉길기념관, 우당이회영기념관, 안중근의사기념관, 만해기념관, 도산안창호기념관 등을 개보수 했다. 또 2016년부터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독립유공자 및 국가유공자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주거환경 개선 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올해까지 독립유공자(후손 포함) 8명과 국가유공자 19명을 선정해 주거환경 개선을 지원했다.
LG하우시스는 3‧1만세시위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에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위치한 심산 김창숙기념관 개보수 지원을 포함한 독립운동 관련 시설 2곳 시설 개보수, 국가유공자 6명 자택 주거환경 개선 지원하고 있다.
차제에 LG나 GS와 같은 민족기업이 많아져서 독립유공자 단체인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의병정신선양중앙회'와 같은 사단법인을 지원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들 사단법인은 의병‧광복군(독립군)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선열과 애국지사 후예들이 정부 지원 없이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공경함으로 몸을 닦아라. 두려워해서 스스로 조심함이 깊은 못을 만난 듯, 엷은 얼음을 밟듯 하라."
LG 가문은 '모춘당'을 지어 춘강 구재서 선생을 기리고 있는데, 선생이 남긴 유훈은 12가지 중 2가지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 어찌 있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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