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
창비
소설의 중반부 이후는 그날 이후의 제야의 고통을 그린다. 제야는 강간을 당한 것이 아닌 게 됐으며, 하루아침에 평판이 나빠진 여자가 됐다. "나는 이제 가만히 있어도 음흉한 애다. 헤픈 애고, 착각하는 애고, 꿍꿍이가 있고, 남자를 꼬드기는 애다." 모두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 주목했다. 모두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잘못했다고 했다. 일 키우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그래야 너에게 좋을 것이라고 어른들은 제야에게 말했다. "내 입장에서 말하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어떤 독자는 소설의 중후반부를 읽으며 이런 기대를 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야가 조금이나마 괜찮아지면 좋겠다고, 그 아이가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좋은 어른인 강릉 이모의 품 안에서 치유되면 좋겠다고.
그 날 이후 가방에 과도를 넣어 다니게 된 제야가, "남자 무리에 있으면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입술을 물어뜯는" 제야가,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경찰서에 신고를 하는 대신 당숙을 칼로 찔러 죽이고 말겠다는 제야가, 여학생들이 하교를 하고 있으면 집까지 따라가 무사히 잘 들어갔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제야가, 늘 죽음을 떠올리는 제야가, 그래도 이모에게서 힘을 얻어 천천히 그 날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실은, 내가 그랬다. 스스로를 평범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 어른들로부터 상처 받은 제야에게, 강릉 이모가 어른들을 대표해 "어른으로서 미안해, 제아야. 정말 미안해" 하고 말했을 때, 제야가 울었을 때, 제야가 조금씩 나아지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책을 계속 읽어나가며 나는 이런 기대가 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워갔다. 진심으로 상대방이 괜찮아졌으면 좋겠다는 이런 마음 자체가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탓하게 하고, 더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선의라고 포장될 수 이런 기대나 마음이 결국은 나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자, 아무것도 모르면서 '피해자다움'을 운운하는 사람들과 내가 뭐가 그리 크게 다른가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는 왜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기대하고 바라는가.
제야는 강릉 이모와 지내면서 힘을 내는 듯도 보였다. 다시 미래를 계획하고, 일상을 영위하고, 검정고시를 보고, 수능을 봤다. 하지만 대학에 다니던 제야는 다시 몸이 굳었고, 죽을 것 같았고, 다시 그날로 돌아갔다. "그것은 기생충처럼, 병균처럼, 생물처럼 산 채로 제야를 간섭했다. 지나간 일이 아니었다." <헝거>에서 록산 게이도 말했다. "매일같이, 하루도 빠짐없이 그 과거를 데리고 다닌다."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에서 몇몇 여성들은 자신들을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나 '승리자'로 불러주길 원했다. 살아남았다는 데서 생존자이자, 죽음과의 싸움에서 이겨냈다는 데서 승리자다.
생존자나 승리자라는 호명은, 강간을 당한 그 날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죽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호명이 아니다. 그 날 이후의 시간에 대한 호명이다. 그 날 이후, 그녀들은 죽는 것이 더 당연할 만큼 끔찍한 하루하루에서 살아남았고 승리했다. 제야 역시 매일매일을 생존자이자 승리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 소설의 끝엔 희망이 있을까. 희망을 봤다면 그것 역시 내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본 것 아닐까. 하지만 난 제야가 조금은 강해진 것 같아서, 그녀가 지금은 괜찮지만 앞으론 다시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돼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과거를 지닌 채 살아갈 방법을 찾고 있어서, '약간의 자유'를 느낄 수 있게 돼서, 자신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에 관심을 갖게 돼서, 아래처럼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게 돼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난 늘 무서워 제니야. 그건 장소 문제가 아니야. 누군가와 같이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도 아니지. 앞으로도 나는 늘 무서울 거야. 나는 비로소 그것을 이해했어."
제야는 아무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자기 자신을 기만하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당숙이 늙고 늙어 힘이 없어지면 갚아줄 거라고 했다.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을 뒤에 두고 다시 0에서 시작할 거라고 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볼 거라고 했다. "나와 잘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제야는 너무나도 사랑하는 동생 제니에게 말했다. 만약에 너에게도 나와 같은 일이 생기면, 죽일 수 있다면 죽여. 그리고 넌, 살아남아. 제야는 살고 싶다고 했다.
"살 수 있는 만큼 다 살아내고 싶은 마음 같은 것. 제야는 살아내고 싶었다."
이제야 언니에게
최진영 (지은이),
창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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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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