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진씨 의문사 조사를 위해 그의 묘를 개장하고 있다. 2003.11.19
오마이뉴스 강이종행
사망 원인
당시 사고현장 실지조사 결과 대공초소는 위병초소로부터 약 350m 떨어진 곳에 있어 저격가능성이 희박했다. 또한 사고 당시 대공초소 근무자도 없었으며 임용준이 단독으로 위병초소 근무를 서고 있었다. 파견분대장 외 7~8명의 동료 모두가 저녁식사를 시작하려다 총소리가 나자 일제히 위병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위병초소 주변은 인가도 전혀 없는 곳으로 현장부근에서 수상한 사람의 인기척을 목격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또한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국방부과학수사연구소는 임용준의 시신을 확인한 후 "타살 혐의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소견을 밝혔다.
지난 2003년 의문사위는 임용준 분묘 개장을 통해 시체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을 실시했다. 이때 목뼈 6번과 7번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파손돼 형태를 재복구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또 파손된 목뼈에서 무연화약의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으며, 흉추와 요추에는 부패에 의한 변화 외에 다른 손상으로 볼 만한 특기할 소견이 없었다. 임용준 두개골의 파손은 부패로 판단되었으며 뇌는 특별히 파손된 부분이 없었다. 결국 이러한 감정결과 임용준 경추(척추를 형성하는 뼈)의 손상은 확인되었으나, 사입구 및 사출구의 확정과 총탄발 수의 확정은 확인이 불가능했다.
결국 이러한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지난 2004년 의문사위는 임용준의 사망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사망 10여 일 전 모친과 면회한 후 입대동기에게 '사람이 죽으면 죽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라고 말한 점, 사고 당일 암호를 수령하기 위해 소속대인 2포대를 방문했다가 2개월 선임병인 정아무개에게 '나 이제 들어가면 못 볼 것이다'라고 한 점을 고려하면, 임용준은 지휘관 등 간부들에 의해 묵인되는 고참병들의 비인격적인 대우 및 상습적인 구타 등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에 이르게 되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탄약고 파견 이후부터 임용준이 사망하기까지 그리고 임용준이 당일 출입한 대대 2포대와 사망 직전 탄약고에서 선임들에 의한 구타나 가혹행위가 있었는지 여부는 확정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임용준이 위법한 공권력 행사에 의해 사망했는가에 대한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오빠가 죽은 바로 다음날 면회하기로 했는데 왜 자살하겠나?"
하지만 지난 2003년 임용준의 동생 임수경씨는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빠가 군에서 의문사 했을 때는 내가) 고2 때의 일이다. 6년 터울의 둘째 오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죽은 바로 다음날 가족이 면회를 가기로 해 오빠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군에서는 자살이라고 했다. 특히 오빠가 좋아했던 캐나다에 사는 고모도 함께 간다는 걸 알았다...당시 유서는 나오지 않았다...오빠가 죽은 바로 다음날 면회하기로 했는데 왜 자살하겠나?"
- "단지 죽은 이유 만이라도 알았으면..."(http://bit.ly/6xDWK)
운동권 대학생 임용준이 군에서 자살했는지 타살 당했는지는 어떻게 보면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대학생 임용준이 시위를 하다가 군대에 끌려갔고 "물리적 폭력수단을 합법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군대에서 우주보다도 소중한 생명을 잃은 것이다. 그런데도 군대에서는 이러한 한 젊은이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안 진다. 그것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우리나라 군대였던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24
<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공유하기
'통일의 꽃' 임수경 오빠 임용준의 의문의 죽음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