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부터 2007년까지 운영한 기록이 담긴 정신대연구소말벗봉사자 카페 캡쳐화면. 그 당시의 단순한 기록이 지금와서 보니 이렇게 소중한 역사기록물이 되었다.
최고은
2000년 봄으로 기억한다. 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가 심각했던 그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생각했던 소시민인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검색하다 정신대연구소 '정신대할머니말벗봉사'를 발견했다. 바로 신청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 언론에 유명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정신대대책협의회가 몇 년 전 여성인권박물관도 만들면서 바뀐 이름이다.
2000년 당시 우리나라에서 정신대 문제(그 당시 일본군 성노예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를 다룬 단체로는 정의연의 전신 격인 정신대대책협의회와 정신대연구소가 있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정신대대책협의회는 수요집회를 비롯해 언론에 나타나고 투쟁하는 앞에 보이는 단체라면, 정신대연구소는 정신대대책협의회에 속한 부서 중 하나처럼 뒤에서 조용히 활동하는 작은 단체였다.
당시 서울 테크노마트 강변역 근처 회사를 다니던 나는 합정역까지 2호선을 타고 가서 자원봉사자 기초교육을 듣고 할머니와 말벗이 되는 말벗봉사자가 되었다. 말벗봉사자는 할머니와 주기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를 하는 자원봉사활동이다. 지금처럼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국제사회에 언급이 크게 되지도 않았던 때라 당연히 많은 지원과 관심도 없었다.
청소년과 일반인의 자원봉사활동이 인정되는 1365가 존재하던 시절도 아니고 그야말로 일제강점기에 여성으로서 몹 쓸 일을 당한 여성에 대한 문제, 정신대 문제에 대한 관심, 할머니와 인간관계를 돌아가실 때까지 맺기 위한 사람들의 단체였다고 할까? 정신대연구소에는 국장님과 간사님이 계셨고 그분들과 월 1~2회 할머니를 찾아뵙기 시작했다.
정신대대책협의회에서 진행하는 수요집회는 주류 할머니들이 나오신다면, 정신대연구소에서 만나 뵙고 챙기는 할머니들은 대부분 언론을 피하는 비주류 할머니였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오신 할머니 두 분과 파주에 사시는 할머니, 고양시 삼송동에 사시는 할머니, 이렇게 4분을 찾아뵈었다.
중국에서 목사님을 통해 어렵게 귀국하신 할머니들은 수십 년만의 우리나라 문화에 괴리를 느끼시고 중국으로 돌아가셨고, 파주 할머니는 아들이 하나 있으셨는데 미국에 살고 있어(한국전쟁 때 미국 병사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미국으로 가신 적이 있어서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삼송동 황 할머니만 찾아뵙게 되었다.
초기에 7~8명 되던 봉사자들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2007년 6월에는 결국 간사 선생님(현재는 제주도에서 사진작가이며 마을 아카이브 단체를 꾸리실 준비를 하고 있다)과 2명의 친구, 즉 나까지 4명만 남게 되었다.
꽃을 좋아하셨던 황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