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강화대교가 놓인 갑곶 선착장 집단 민간인 학살지 알림판. 1951년 1월 6일에서 8일까지, 강화향토방위특공대는 할머니, 부녀자, 아기 등 민간인 약 300여 명을 집단학살했다고 적혀있다. 이런 일은 상호간에 일어났다.
원동업
갑자기 주도권 잡은 이들... 시부모에 '동무'라 부르던 며느리
"그때 우리 친구 누이 둘이 완장을 찼어요. 말단 근로자들, 가난한 사람들, 소작농 그런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은 거야. 시집온 지 며칠 안 된 며느리가 어느 날 시아버지 보고 '아버지 동무' '시아버지 동무' 북한에선 그랬다고. 이거 환장하는 거지. 어제까지 이웃으로 지내던 사람들이 총대를 메고 와서..."
유엔군과 한국군이 반격했던 1950년 9월경부터 12월 흥남 철수로 대표되는 후퇴 시기까지는 강화에서도 '남쪽 세력'이 맹위를 떨쳤다. 북한 주력군과 더불어 '핵심 부역자'들은 대개 쫓겨가는 인민군들을 따라 사라졌다. 이 공간을 메운 것은 서북청년단 같은 반공단체들이었다. 이들은 그간 이웃으로 지내왔던 사람들, 멀리 살지만 한민족으로 살았던 이들을 번갈아 가며 죽였다.
이철옥 선생은 전쟁 발발이 있던 1950년 6월부터 같은 해 12월 인천에서 제주행 피난 배를 타기까지 6개월여 기간 동안 혈구산 골짜기에서 농사를 돕는다. 들리는 소문, 혹은 가끔은 직접 가서 보는 전쟁은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철옥이 개입할 세상은 아니었다. 그가 제주로 피난을 가게 된 이유는, 끝내 피난 가기를 거부해 집에 남았던 동네 할머니의 때아닌 보호자가 되면서였다. 그들은 함께 피난 배에 올랐고 그 배가 제주에 닿았다.
- 제주에서의 생활은 어떠셨어요.
"제주에 가니까 마을마다 돌담 안에서 살아요. 유격대가 밤이면 공격을 해오니까 담을 쌓았다는 거예요. 우리는 어느 집에서 묵게 됐는데, 피난민들에게 배급이 조금 나왔어요. 근데 그걸로는 먹고살기가 어려우니까, 모두 궁리가 필요했어. 같이 피난 간 이웃분 중에 차를 갖고 성산포에서 고등어를 떼어다 파는 분이 있었어요. 당시엔 뭐에 절이거나 포장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차에다 막 다 실었다고. 나는 그 차를 타고 가다 적당한 곳에 내려요. 그리곤 지게에다 고등어를 퍼주는 거지. '그걸 팔아라!' 그렇게 해서 도움을 받았어요."
- 어린 나이인데 힘드셨겠어요.
"고등어들이 차에서 흔들리잖아요. 길도 안 좋고 그러니까. 그러면 모래랑 자갈이랑 넣고 같이 흔들면 돌이 위로, 모래가 아래 가듯, 고등어도 그렇게 돼요. 그런데 나한테는 위에서 퍼주니까, 다 큰 것만 받잖아요. 나한테는 그게 이득이에요. 그걸 갖다가, 내가 그때 (제주) 세화 쪽에 있었는데, 거기까지 팔며 가는 거예요. 남으면 그걸 우리가 먹고. 그러니까 나한테는 세 번이 이득이었어요. 장사하게 된 거, 큰 고등어 받은 거, 그리고 남은 걸 먹는 거."
나는 이철옥 선생과 함께 지난 5월 8일~10일 2박 3일 동안 강화도와 교동도, 연천과 전곡과 동두천, 그리고 철원의 노동당사나 백마고지 전적지를 돌았다. 1947년부터 군 제대를 한 1956년여까지, 그가 거쳐간 곳들이었다.
2박 3일의 자동차 여행에서 그의 짐은 작은 옷 가방 하나뿐이었다. 강화도에서 4만 원짜리 여관에 묵을 때나, 아침밥으로 전날 남은 떡 몇 점을 나눌 때도 그는 한 점 불편한 기색조차 없었다. 배고픔도 잠자리의 불편함도 그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듯했다. 더 어려운 시기를 건너왔기 때문에 생긴 버릇이라기보다는 천성에 가까워 보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근데 이제 봄이 되니까 날이 덥잖아요. 햇빛도 위에서 내리쬐고. 그래서 풀을 좀 베어다가 고등어를 덮었다고. 그늘을 만든다고. 근데 가다 보니까 아지매들이 막 뭐라 그래요. 그 풀로 덮으면 고등어가 더 빨리 상한다는 거예요. 어느 날엔 바닷가에도 갔어요. 물속 바위틈으로 보니까 노란 불빛 같은 게 두 개 보여요. 아지매들께 물었지. '저게 뭐예요?' 그러니까 '잡수궤요!' 그래요. 그래 손을 넣었지. 그랬더니 문어가 팔뚝 어깨까지 날 붙잡는 거예요. 내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으니까 아지매들이 깔깔 웃어요."
2019년 5월 14일 첫 만남과 그해 6월 19일 두 번째 만남, 2020년 조금 길게 정식으로 녹음을 했던 4월 17일, 그리고 5월 여행에서 이철옥 선생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북한 공산정권하에서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 그는 특히 분노했다.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참전유공자들을 홀대하는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서운함과 질책을 숨기지 않았다. 그 이야기들엔 모두 사실적 근거와 자신만의 기준이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공개'를 앞두자 그는 그런 이야기들을 묻고자 했다. 그게 자칫 진실을 알리는 데 방해가 되거나, '정치적 논란'이 될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 선생 말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았다. 어떤 일은 사실을 다시 짚거나, 맥락을 달리 볼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큰 줄기에서 나는 그에게 전적으로 공감했다. 개인이 가진 고유의 자유, 생각하고 말하고 어떤 신을 믿고, 사회체제를 선택해 이동할 자유. 그는 그런 것들을 지키고자 했다. 미워하고 싸우는 일, 거짓을 말하고 속이는 일도 그는 거부했다. 모함을 당했을 때에도 묵묵히 자기 일을 했고, 옳은 일을 했어도 그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봤을 땐 미안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