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온 사람들 / 홍지흔 > 본문 중에서
홍지흔
내가 지금 향하는 곳이 그 집이 있던 자리다. 당시 지내고 있던 북서쪽 장목에서 흥남을 거쳐 약 10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다고 한다. 내 발걸음 위에 두 아이의 허기진 배와 검정 고무신의 불편함을 올려 상상해 본다.
정확한 비교는 아닌 것 같다. 나는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과거의 발자취를 따를 뿐이고, 그들은 마을에 다다른 후 이장님이 적어준 쪽지 한 장에 의지해 낯선 이들에게 양식을 빌어야 했으니까.
"우리 엄마한테 밥을 주셔서 감사해요"
멀리 '대통령의 마을'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길을 가로지르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외포리다. 코로나19 때문에 휴관 상태여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뒷골목 계단으로 올라가 기와지붕 아래 널찍한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당시 거제에서 이름난 부자이자 김 전 대통령의 부모님이 살고 있던 이 집, 이 툇마루 어딘가에 엄마와 이웃 아이가 앉았을 것이다. 주인 아주머니는 군말 없이 쌀자루를 내주었고, 하인을 시켜 밥상도 차리게 했다.
큰 기와집과 푸짐한 밥상을 두고 기뻤을지, 기가 죽어 부끄러웠을지 칠십 년 전 두 아이의 마음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주인아주머니의 영정이 걸려 있는 처마를 향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엄마한테 밥을 주셔서 감사해요.'
<건너온 사람들>의 주인공들은 기적의 배로 불리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거제도 장승포에 도착해 따뜻한 밥상에 둘러앉는 결말을 맞이한다. 엄마의 가족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거제도에 정착했고, 삼 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던 고단한 이방인의 생활은 거제도에서 부산으로, 다시 서울로 이어졌다.
어릴 적부터 들어온 외가의 피란사는 만화를 그리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작품 소재인 동시에 어려운 숙제였다. 한동안 망설이다 지난해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책이 나온 후 어른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열렬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았다.
앞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두 분의 삼촌들, 사흘 전 부산에서 장례를 치른 큰 사촌 언니에게도 이 책을 보여드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의 능력은 빠르게 흩어져가는 그들의 세월을 따라잡기가 버거웠다. 다시 흥남마을로 되돌아가기 위해 기념관 앞에서 버스를 탔다. 이십 분도 안 되어 내가 아침부터 걸어온, 칠십 년 전 두 아이가 걸었던 길이 끝났다.
한 권의 책이 된 '엄마와 가족들의 삶'
서점은 예상보다 많은 손님들로 밝게 북적였다. 음료를 주문하고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첫 정착지인 거제도에서 내 책이 소개된다면 외가 어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서점 사정에 따라 책은 이곳에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책을 알리는 일은 만들 때 만큼이나 쉽지가 않아 고민이지만 정작 엄마나 삼촌, 이모들에겐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읽어주지 않아도 그들의 모든 것이 이야기다.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면 최선을 다해 살았던 매 순간의 흔적이 펼쳐진다. 전쟁의 바다를 건너온 아이들과 그 아이들 - 나의 형제와 사촌들, 먼저 세상을 달리한 사촌 언니, 그리고 지금 막 새로운 흥남의 서점에 도착한 나 역시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갈피마다 담겨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