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조퇴
창비
쓰는 나부터 웃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것은 동화였고,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장르였다. 한푼 두푼 알뜰하게 모으는 아이처럼 그날그날의 원고 작업량을 기록했다. 20여일 만에 단편 동화 세 편을 썼다. 아무 것도 되지 못한 글이지만 내 자매를 비롯한 친구들은 기꺼이 읽어주었다. 재미있다고 해준 말에 용기가 생겨서 한 출판사에 투고했다.
"글이 참신하고 재미있네요. 그런데 우리 출판사는 저학년 동화를 많이 안 펴내요. 창비 같은 큰 출판사에 보내보세요."
원고를 읽은 출판사의 편집장님은 전화로 알려줬다. 창비라니.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창비 전집을 팔러 다니는 '창비 아저씨'가 있었다. 나도 24개월 할부로 책을 샀다. 1년에 한 번 꼴로 자취방을 옮겨 다니면서도 대문호들의 작품이 실린 창비 전집을 애지중지 모시고 다녔다. 그런 대단한 출판사에 처음 쓴 동화를 보내도 될까?
창비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 처음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메일의 '수신함'을 지켜보고 있지도 않았다. 초조해 할수록 노안이 빨리 오고 심신이 약해질 것 같아서 잊고 지냈다. 정확히 2주 뒤인 1월 18일 금요일 오후, 창비 어린이출판부 책임편집자님의 전화를 받았다.
"표제작은 모두 재밌게 읽었습니다. 다른 두 편은 조금 아쉽다는 의견이 있어서요. 아이들이 능동적이거나 갈등 상황이 잘 드러나지 않아요. 또 가정 위주로만 벌어지는 일이니까 학교 얘기가 들어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작품을 새로 쓰시면, 다시 한 번 보내주시라는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아, <유혹하는 글쓰기>를 자주 읽은 게 탈이었다. 월세 90달러짜리 집에 살던 스티븐 킹은 <캐리>의 판권이 40만 달러에 팔렸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 감격의 순간을 함께 나눌 아내와 아기들은 처가에 있어서 스티븐 킹의 가슴은 더 터질 것 같았다. 출판하자는 전화를 받은 것도 아닌데, 나는 스티븐 킹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새로운 이야기는 바로 쓰지 못했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봄꽃이 차례대로 피고지고 공기가 습습해질 때야 주인공 아이랑 잘 어울리는 짝꿍이 떠올랐다. 반마다 있게 마련인 '귀여운 빌런'도 튀어나왔다. 다른 반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선생님까지 등장시켰더니 신통하게도 이야기는 나아갔다. 어떻게 끝날지, 나도 궁금했다.
기차가 급브레이크를 길게 밟는 것처럼 매미 울음소리가 거슬리던 지난해 7월 23일. 나는 창비 어린이편집부 책임편집자님의 전화를 받았다.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까 봐 방으로 들어가서 창문을 꽁꽁 닫았다. 꺄아! 계약하잖다. 2020년 6월에 출간할 거라는 계획까지 들었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12월, 출판사는 내가 쓴 원고의 출간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1월 23일에는 1교 교정지를 우편으로 보내줬다. 이메일로 교정지를 주고받는 것하고는 느낌이 달랐다. 편집자님은 연필로, 때로는 볼펜으로 교정지 곳곳에다가 내 의견을 물어봐 주었다.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제목이 자주 언급되는데요, 시간이 지나면 낡은 느낌이 들 수 있어서 덜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저학년 대상의 동화이다 보니 할아버지가 사투리를 쓰는 게 조금 우려 됩니다. 표준어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들이 사투리를 너무 낯설게 여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번 살펴봐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나는 교정 작업을 하면서 동화 쓰기를 배운 셈이었다. 취재한 사례들을 이야기에 구체적으로 녹이는 게 다 좋은 건 아니었다. 주인공의 짝꿍은 독감에 걸렸다. 독감 약을 먹으면 자다가 초인종 벨 소리 같은 환청을 듣는 경우가 있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도 한다. 그대로 쓰면, 어린이들이 약 먹는 걸 두려워할 수도 있는 거였다.
3교는 크로스 교정이었다. 다른 편집자가 담당 편집자 눈에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던 교열 등을 새로운 눈으로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동화집에 실릴 첫 번째 이야기(손톱이 빠진 날)와 두 번째 이야기(내 꿈은 조퇴) 사이에 '손톱'을 넣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이때 나왔다.
덕분에 첫 번째 이야기에서 손톱이 빠진 아이는 3학년 올라갈 때 손톱이 초승달만큼 자랐고, 리코더를 부는 게 힘들어서 독감에 걸리고 싶어 하고, 독감 검사의 실체를 알고는 건강해지려고 하는 두 번째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억지로 끼워 맞춘 교훈이 없는 유쾌한 동화"
군산에서 한 달 살기 하고 <여행기 아니고 생활기예요>를 쓴 서울시민 권나윤 작가는 내가 처음으로 쓴 동화집의 실물을 보지 않고서도 호언장담했다. 나를 '초통령'으로 만들어주겠단다. 컴퓨터도 잘하고, 강의도 잘하고, PPT도 잘 만들고, 무엇보다 무척 웃기는 사람이라서 완전히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