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8일 방송된 'PD수첩 -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의 한 장면
MBC
내남면 민보단 단장 이협우는 후일 어떻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그는 10년(1950~1960) 동안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협우는 대한청년당 소속으로 출마해 16%인 7825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당시 경주 을구에는 총 16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했는데, 이협우는 을구에서도 면세가 컸던 내남면에서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그렇다면 내남면 주민들은 민보단에 그렇게 당하고도 왜 이협우를 선택했을까? 그 비밀 열쇠는 '공포'였다. 1960년에 경주유족회장을 지낸 김하종(88,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4동)은 "당시에는 (이협우가 무서워) 민보단 사무실이 있던 면소재지 근처에 얼씬 거리지도 않았어요. 국회의원 선거 때는 이협우가 당선되면 경주를 뜰 테니까 찍어주자 그랬어요"라고 증언한다.
당시 내남면 이조리에 살았던 최상춘(84,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은 특이한 증언을 했다. "이협우가 2대 국회의원 선거 때 자연부락마다 모의투표를 했어요. 하천 변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했는데, 자기 표가 적게 나오는 마을은 '절단'을 냈어요."
이협우는 해방 직후 내남면에서 대동청년단·민보단·대한청년단 단장을 거치며 반공투사로서의 업적(?)을 쌓아나갔다. 절대 다수가 불법적인 학살사건이었지만, 그 결과 주민들은 이협우와 민보단을 두려워하며 공포정치에 떨게 됐다.
해병대 장교들이 법원 앞에서 데모한 사연
1957년 봄 경주지방법원 앞에서는 특이한 데모가 열렸다. 해병대 장교들이 '이협우를 구속하라', '유칠문의 재산을 반환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감행한 것이다. 이협우는 당시 자유당 소속의 국회의원이었다. 이승만 정권 시대에 집권 여당 국회의원을 구속하라는 사상 초유의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시위에 참여한 해병대 장교들은 얼마 안 있어 모두 강제 예편되었다. 이런 특이한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1957년 2월 해병대에 근무하던 유칠문은 이협우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내남면 망성리 출신으로 1949년 3월 8일 두 형과 가족을 민보단 손에 잃었다. 유칠문의 형 유칠우·유찬조가 남로당원이라는 밀고를 받은 민보단은 밤에 유씨 집을 불태워 일가족을 모두 죽였다. 동생 유칠문은 당시 친구 집에 머물고 있어 화를 면했지만, 형들이 죽은 이후로는 객지를 전전했다. 토지 2500평과 대지 159평도 이협우가 이끄는 민보단에 빼앗겨 버렸다.
이후 해병대에 들어간 유칠문은 휴가를 한번도 쓰지 않았다. 고향에는 일가족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가 이협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씨가 휴가를 쓰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해병대 장교들이 그를 불러 물었고, 유씨는 이실직고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해병대 장교들은 분개했고, 이들의 응원에 힘입은 유칠문은 토지반환소송을 전개한 것이다.
그리고 재판부 판결이 다가오자 해병대 장교들은 경주지방법원에서 시위를 감행했다. 하지만 이협우가 어떤 자인가? 그는 국방부장관을 만나 군인들의 '정치개입'을 성토했고, 그 결과 해병대 장교들은 강제예편 당했다. 또 형사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한 유칠문은 1957년 6월경 소를 취하했다.(이창현, 「경주 내남면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운동에 관한 연구」, 2009 / 임종금, 『대한민국 악인열전』, 2016), 김하종 증언)
하지만 유칠문이 제기한 소송은 전혀 무의미하지 않았다. 3년 후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경주유족회는 이협우를 '살인 및 방화혐의'로 고소한다. 이 재판 와중에 이협우는 스리슬쩍 유칠문에게 토지를 돌려주었다.
유칠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1950년대는 '동토의 왕국시대'였다. 가해자는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해 두 다리 뻗고 자고, 피해자는 10년을 숨죽여 살아야 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이협우는 경주유족들에 의해 살인·방화·강도 혐의로 고소되었고,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혁명재판소는 그에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지서가 있는 곳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 돌아서 가야 했던 김하종, 차라리 이협우를 찍어 줘서 경주에서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던 내남면 주민들, 이협우와 민보단에게 가족을 잃었으면서도 찍소리 한 번 못하고 살아야 했던 이들의 마음을 누가 알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