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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뮤지션 남매의 전혀 다른 삶... 마지막은 달랐다

[사연 있는 클래식] 최종회, 파니 멘델스존을 기억하며

등록 2020.08.16 19:52수정 2020.08.16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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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기사 '결혼행진곡 멘델스존'만 기억하는 건 좀 서럽습니다'에서 이어집니다. 

빌헬름은 파니와의 교재를 반대하는 파니의 부모에게 자신을 어필해야 했다. 화가가 매력을 발산할 방법은 무엇이었겠는가? 당연히 그림이다. 빌헬름은 연필로 멘델스존 가족의 가족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림의 중앙에 파니를 정성스레 그려 넣었다. 그리고 완성본을 보냈다. 빌헬름의 그림을 본 레아는 그의 출중한 실력에 마음이 흔들렸다.


파니의 작곡 실력도 눈이 부시게 발전했다. 주로 피아노곡과 가곡이었는데, 파니의 부모는 여자가 곡을 출판하는 일은 적절치 못한 행동으로 여겼다. 그래서 펠릭스의 작품(작품번호 8번과 9번)에 파니의 곡 여섯 개를 넣어서 출판했다. 이때 펠릭스가 출판한 이 작곡집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곡은 '이탈리안'이었는데, 이 곡은 파니가 만든 곡이었다.

훗날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작품번호 8번인 '12개의 노래'를 연주했는데, 빅토리아 여왕 또한 '이탈리안'이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이라 했다. 물론 펠릭스는 연주할 때마다 청중들에게 이 곡이 파니의 곡임을 잊지 않고 말했다.

파니가 집에서 만든 곡을 집안에서 겨우 연주하는 동안 펠릭스는 전 유럽을 돌면서 폭넓게 문화를 흡수하고 있었다. 이런 다양한 경험은 당연히 곡의 성장을 이끌었다. 보고 느끼는 것이 많으니 창의력이 더 솟아날 수밖에. 펠릭스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었고 파니는 아버지의 당부에 따라 '여성의 소명'의 굴레에 묶이고 있었다.
   
천재 남매 뮤지션의 전혀 다른 삶
 
 수레바퀴(빌헬름 헨젤)
수레바퀴(빌헬름 헨젤)위키피디아
 
빌헬름이 로마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와 프로이센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빌헬름의 실력이 인정되자 부모님의 반대에 맘졸였던 파니는 그와 결혼을 선포했고 빌헬름은 멘델스존 일가를 그린 연필화 '수레바퀴'를 펠릭스에게 보냈다. 바퀴 중앙에 펠릭스를 그려 넣고 바큇살에 해당하는 부분에 가족들을 그려 넣은 작품인데, 바퀴 중앙의 펠릭스는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는 모습을 상징한 것이다.

1829년, 파니는 결혼을 앞두고 웨일스에 있던 펠릭스에게 결혼식 때 쓸 오르간 연주곡을 부탁했다. 펠릭스 또한 기꺼이 곡 작업에 착수했지만, 며칠 후 마차가 전복되는 큰 사고가 나고 만다. 펠릭스는 연주는커녕 결혼식에도 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예술적 영혼의 동반자인 펠릭스가 오지 못한다는 사실에 파니는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결혼식에 울려 퍼질 오르간 곡을 그 자리에서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단숨에 만든 곡은 파니가 신부 입장할 때 무사히 연주되었다.


다음 해에 귀여운 아들이 태어났다. 파니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인 루트비히 베토벤과 제바스티안 바흐의 이름을 따라 펠릭스 루트비히 제바스티안 헨젤이라고 지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달라진 생활 때문에 창작의 어려움을 겪으며 파니는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침체기가 길어지면서 한없이 뒤처지는 기분에 조바심은 커졌다.

파니는 그동안 멈췄던 일요콘서트를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만든 곡을 연주하기도 했고, 남성 합창단이 주류를 이루던 시절에 여성 합창단을 무대에 세웠다. 이 살롱은 실력 있는 음악가들끼리 서로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로 자리매김하면서 수준 높은 음악 살롱이 되어갔다.


이를 통해 파니는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음악 감독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다. 음악 살롱의 점점 인기는 높아졌고 1831년 6월부터 7개월 동안 네 곡의 칸타타를 작곡하는 등 파니의 창작열도 높아졌다. 이는 파니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되었다.

1831년, 베를린에 콜레라가 창궐하면서 철학자 헤겔과 파니의 스승이었던 프리드리히 첼터 등 멘델스존 가의 가까운 친인척이나 지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파니는 이를 위로하기 위해 칸타타'욥'과 '헤로와 레안더'를 작곡했다. 전염병이 한풀 꺾이자 레아는 파니의 작품들이 출판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미 유명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펠릭스에게 의견을 구했다.
 
 파니와 펠릭스
파니와 펠릭스문하연
  
펠릭스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파니가 작품을 출판하는 일은 여성의 의무에 짐만 되는 행위라서 자신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게다가 파니가 작곡가로서 경력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파니는 이미 250여 곡에 달하는 작품을 만들었거니와 살림보다는 작곡이 우선인 삶을 이미 살고 있었다. 다만, 파니는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일이 마치 벌거벗은 채로 세상에 서 있는 것처럼 두려웠다. 이런 심정은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여성 예술가들은 남성 예술가들 사이에서 늘 불안감을 배로 느낄 수밖에 없다. 롤모델도 없거니와 '여성의 소명'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작품에 대해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하는 사람은 모두 남성이다. 이렇게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어느 누가 여성 예술가에게 극찬하겠는가? 이는 펠릭스도 마찬가지였다. 작곡은 남성 전유물이란 생각이 은연중에 각인되어 있었다.

이 와중에 파니의 출판을 격려한 사람은 그녀의 남편 빌헬름뿐이었다. 하지만 파니는 펠릭스의 동의가 없이는 출판하지 않을 마음이었다. 누구보다도 그의 의견이, 인정이 그녀에겐 중요했다. 펠릭스는 이미 유럽을 지배하는 음악가로 성장하고 있었으니까.

이 와중에도 파니는 작곡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창작에 대해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새로운 자극이나 지식의 습득 없이 무한하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법이다. 자기 복제에 가까운 작품들을 몇 개 쓰고 나면 작곡가든 작가든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1838년, 파니의 자신의 절망스러운 마음을 적어 펠릭스에게 보내는데, 여기에 그녀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사랑하는 펠릭스, 이 겨울에 단 한 곡도 작곡하지 못했단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전보다 연주는 더 많이 하고 있지만, 가곡을 작곡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아. 그런 느낌을 다시 알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가족과 함께 떠난 이탈리아 여행에서 해결되었다. 이탈리아는 화창하고 온화한 날씨에 역사적 유물과 찬란한 예술품이 가득한 나라다. 파니는 이곳에서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의 작품을 보았으며, 작곡가인 베를리오즈, 구노 등을 만나 그들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연주도 했다. 모두 파니의 지성에 놀라고 연주에 넋을 잃었다. 이들이 보여준 반응은 파니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1841년,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파니는 <일 년, Das Jahr> 을 작곡한다. 이 곡은 1월부터 12월까지 각 달을 의미하는 12개의 곡으로 만들어졌으며 빌헬름의 삽화와 함께 짧은 시가 쓰였다. 여기에 쓰인 시는 독일의 낭만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울란트, 괴테, 아이헨도르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파니는 이 곡에 계절, 종교, 일상적인 사람들의 삶을 담았으며, 이 곡 안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시간은 그저 흘러버린 시간이 아니라 다시 순환되는 시간이다.

나이 마흔의 도전, 그 짜릿한 결과

1842년, 어머니 레아가 사망했다. 파니는 매주 일요일 콘서트를 열어 자신이 만든 실내악, 합창곡, 피아노곡들을 선보였다. 합창단도 꾸리고 작은 오케스트라도 만들어 펠릭스가 만든 곡뿐 아니라 다양한 곡들을 연습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를린 합창단도 파니의 음악 살롱을 높게 평가했다. 드디어 파니는 출판을 결심한다. 그리고 펠릭스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네가 그다지 기뻐하지 않을 거란 걸 아는데 일을 진행하려니 조금 어색하구나. 비웃고 싶으면 그렇게 하렴. 마치 내가 열네 살 때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나이 마흔에 남동생을 무서워하고 있구나. 여러 말 할 것 없이 나는 지금 출판을 준비 중이란다!
 
 파니 멘델스존 우표
파니 멘델스존 우표위키피디아

1846년, 드디어 가곡 작품집과 20여 곡의 피아노 독주곡이 출판되었다. 파니의 우려와 달리 베를린 음악계에서 큰 박수를 받게 된다. 다음 해 5월 14일, 파니는 다가오는 일요음악회에서 연주할 펠릭스의 '발푸르기스의 첫 번째 밤'의 리허설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쓰러지고 만다. 의사가 허겁지겁 당도했지만, 뇌출혈이 상당히 진행되었고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파니는 세상과 작별했다.

파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펠릭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평생에 걸쳐 음악뿐 아니라 집안일이며 모든 것을 의논하고 공유했던 누나의 죽음은 멘델스존을 무너뜨렸다. 마지막 순간에 펠릭스는 마음의 짐이라도 덜고 싶었는지, 파니의 악보 중 일부를 정리해 음악 출판사로 보냈다. 그리고 파니가 간 지 육 개월 만에 펠릭스도 그 뒤를 따랐다. 천재 남매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그동안 사연 있는 클래식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서적
세이렌의 노래 (이디스 재크 지음, 배인혜 옮김, 만복당)
멘델스존, 그 삶과 음악 (닐 웬본 지음, 김병화 옮김. 포노)
더 클래식 둘- 문학수. 돌베게.
파니 멘델스존 헨젤의 Das Jahr 분석연구 – 이원문화센터 이영신 저술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인천 투데이에도 실립니다.
#여성 예술가 #남매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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