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이 지나도 알 수 없는 '일장기 말소 사건' 구속자

허술한 국가보훈처 공훈록...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 구속자는 누구?

등록 2020.08.25 10:44수정 2020.08.2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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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장기가 없는 손기정 사진(동아일보 2017년 8월 9일 사진의 일부를 재촬영한 것임)

일장기가 없는 손기정 사진(동아일보 2017년 8월 9일 사진의 일부를 재촬영한 것임) ⓒ 동아일보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를 보던 조선총독부 관리들은 눈을 의심했다. 지난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참가해 2시간 26분 14초라는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황국(皇國) 신민' 손기정의 가슴에 일장기가 없는 것이 아닌가! 손기정과 남승룡은 분명히 일장기를 가슴에 꿰매달고 출발선에 섰었다. 그런데 시상대 맨 앞에 선 동메달 남승룡의 웃옷에는 일장기가 선명한데, 금메달 손기정의 독사진에 보이는 옷은 그냥 희기만 했다.

며칠 전인 8월 13일치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이미 문제의 싹이 있었다. 두 신문 모두 일장기가 있는지 없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손기정 사진을 게재했었다. 총독부가 문책을 하자 두 신문사는 인쇄가 잘못되어 그렇게 흐릿하게 나왔다고 변명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갔는데, 지금은 일장기 자체가 아예 없다.

손기정 사진에서 일장기를 없애버리다

총독부는 동아일보 사회부의 현진건(소설가) 부장, 이길용, 장용서, 조사부의 이상범(화백), 사진부의 신낙균 부장, 백운선, 서영호, 월간 신동아의 최승만 잡지부장 등 8명을 구속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장기 말소 사건'에 따르면 '이들 구속자들은 40여 일 고초를 겪은 끝에 ①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 하지 않을 것 ② 시말서를 쓸 것 ③ 다른 사건이 있을 때에는 가중 처벌을 각오할 것 등의 서약서에 서명하고 풀려났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자 공훈록의 〈신낙균〉에는 '신낙균을 비롯하여 백운선 ‧ 이상범 ‧ 서영호 ‧ 이길용 ‧ 장용서 ‧ 현진건 ‧ 임병철‧ 최승만 ‧ 송덕수 등 동아일보 사원들이 일제 경찰에 구속되어 40여 일에 걸친 문초를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과사전에 없는 임병철 ‧ 송덕수 2명이 추가되어 있다.
 
 현진건(국가보훈처 공훈록의 사진임)

현진건(국가보훈처 공훈록의 사진임) ⓒ 국가보훈처


같은 공훈록 〈현진건〉은 또 다른 설명을 보여준다. 〈현진건〉에는 '사건의 직접 책임자인 현진건을 비롯하여 이길용 ‧ 최승만 ‧ 신영균 ‧ 서영호 등 5명은 "① 언론기관에 일체 참석하지 않는다. ② 시말서를 쓴다. ③ 만약 또 다른 운동에 참가했을 때는 이번 사건의 책임에 가중하여 엄벌 받을 것을 각오한다"는 내용의 서약을 강요당하고 1936년 9월 26일 석방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인원이 백과사전보다 3명, 〈신낙균〉보다 5명 적다. 게다가 두 곳에 없는 신영균을 등장시키고 있고, 신낙균은 보이지 않는다. 신영균(申榮均)은 신낙균(申樂均)의 오기인 듯 여겨진다.

일장기 말소 사건 구속자는 누구인가?

과연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없애버린 일로 일제에 구속된 사람은 누구누구인가? 한국학중앙연구원은 8명, 국가보훈처 공훈록의 〈신낙균〉은 10명, 〈현진건〉에서는 그나마 1명의 이름이 틀린 듯한 상태로 5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만약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기술이 사실에 부합한다면, 국가보훈처는 중앙정부 해당 부처로서 엄중한 질타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어디서 신뢰할 만한 독립운동 자료들을 읽을 수 있겠는가.
  
일장기 말소 사건에 관한 한 국가보훈처 공훈록은 또 다른 부족함을 보여준다. 공훈록에는 현진건, 이길용, 신낙균 3명만 나온다. 게다가 신낙균은 인물 사진도 없이 수록돼 있다. 신낙균은 1899년에 태어나 1955년에 세상을 떠난 현대사의 인물로, 동아일보 사진부장을 지낸 사람인데 공훈록에 실을 사진 한 장 구할 수 없다는 말인가?


너무나 허술한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아무튼 일장기 말소 사건을 일으킨 당시 동아일보 직원들은 언론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민족 지사들이었다.


일찍이 정도전은 <삼봉집>에서 '몸의 잘못보다 마음의 잘못을 비판할 줄 아는(身過不若諫心過) 천하제일의 인재를 간관에 임용해야 한다(當用天下第一流)'고 했다. 조선 시대의 간관(諫官)은 곧 현대사회 언론인이다. 일장기 말살 사건을 보면 정도전의 그러한 주장은 저절로 납득이 된다.
 
 이길용(국가보훈처 공훈록의 사진임)

이길용(국가보훈처 공훈록의 사진임) ⓒ 국가보훈처


그러나 일장기 말소 사건 독립지사들의 후배 언론인들은 정도전이 말한 수준의 인재와는 거리가 멀어진 듯하다.

한 예로,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일인 1980년 9월 1일치 어느 신문을 살펴본다. 각 면마다 다음과 같이 전두환을 떠받드는 제목들이 시커멓게 박혀 있다.

폐습 물든 정치인엔 정치 못 맡겨
참신한 새 내각 소문 속 학계 인사 이름 들먹
과감한 부패 척결 등 전 대통령 높이 평가
전 대통령 취임식 날, 역사의 새 장에 부푼 기대
- 전국 경축 일색


전두환이 누구인가? 전두환은 1979년 12 ‧ 12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고, 1980년 장충 체육관 보궐 선거에 단독 출마해 유권자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25명의 99.9%인 2524명 지지를 받아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1년 제12대 대통령 선거 때 '체육관 선거(〈다음 백과〉)'에서 90.1% 득표로 재차 당선되었다.

그 후 전두환은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12 ‧ 12사태와 5 ‧ 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수천억 원 대통령 비자금 조성 등 혐의로 1995년 구속수감되어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및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았다. 그는 전 재산이 29만 원뿐이기 때문에 추징금을 납부할 수 없다고 버텼고, 현재도 그 일부만 추징되었다.

그런 전두환을 신문은 찬양 일색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다른 신문들은 더 살펴보지 않는다. 대동소이할 것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전두환에 아부일색인 후배 언론인들의 태도

현진건이 1980년에 생존해서 이런 정치와 언론을 지켜 보았으면 또 다른 〈술 권하는 사회〉를 썼을지 모른다. 이쯤에서 1921년 11월 <개벽>에 발표된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를 다시 읽어본다.

자정 넘어 새벽 1시가 되었건만 남편은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결혼한 지 7∼8년이 흘렀어도 함께 지낸 날은 1년도 채 안 된다. 남편이 동경에 유학 가 있을 때에도 그리워만 했을 뿐 참는 도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온 남편은 나날이 쇠약해져 간다. 게다가 요즘 들어서는 날마다 고주망태가 되어서 밤늦게 귀가한다.

어느덧 새벽 2시, 대취하여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남편이 드디어 집에 왔다. 아내는 "누가 이렇게나 술을 권했어요?" 하고 묻는다. 남편은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했다오!" 한다. '사회'란 낱말을 알지 못하는 아내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편은 "아아, 답답해!"를 되풀이하더니 아내의 붙드는 손을 뿌리치고 또 밖으로 나간다. 아내는 멀어져가는 남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사회란 것이 무엇인데 왜 내 남편에게 자꾸 술을 권하는가!" 하고 탄식한다.
#일장기 말소 사건 #현진건 #이길용 #8월25일 오늘의 역사 #손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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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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