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7.자 아이다호 광고 모습
박한희
그렇게 수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며 광고 캠페인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게시 종료를 5일 남겨둔 8월 26일 누군가가 검은 매직으로 광고판에 낙서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즉각 경찰에 신고하고 수사 결과를 기다렸지만, 바로 다음 날인 8월 27일에는 푸른색 물감으로 글씨를 알아보기 어렵게 광고판이 훼손되었다. 연이어 이어지는 증오 범죄 앞에서 캠페인 기획단은 고민하였다. 경찰 수사를 통해 범인에 대한 즉각 검거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이것이 훼손 자체를 예방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광고를 재게시하더라도 훼손이 반복될 우려가 있었다.
이에 기획단은 증오 범죄의 실상을 알리는 의미에서 훼손된 광고를 재게시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게시까지 남은 4일 동안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신촌역에 지킴이로서 상주하기로 했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우리의 광고판을 꾸며줄 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3박 4일 바짝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함께 지키고 만들어가는 공간
쉽지는 않은 결정이었다. 신촌역은 매일 오전 5시부터 자정까지 개방된다. 지킴이를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새벽에 나오고 한밤중에 들어가야 한다. 나의 경우 3일 동안 새벽 시간대를 지켰는데 첫차도 뜨지 않은 새벽 3시경 집을 나오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러 활동가가 자원하여 필요한 시간대가 모두 채워졌다.
그렇게 하여 3박 4일 바싹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사실 지킴이라고 하지만 특별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광고판을 마주하고 역사 내에 몇 시간 동안 앉거나 서 있으면서 가끔 광고판에 적힌 메시지들을 한 번씩 다시 보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다만 그 효과는 분명했다.
사람이 앞에 있음으로써 혹시 있을지 모를 훼손을 예방했을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시민들이 광고판을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역사 바닥에 앉아 있는 나를 한번 신기하게 쳐다보고는 시선을 따라 광고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심히 지나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문구를 따라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사진을 찍는 이들도 많았다. 기사를 통해 소식을 접하고 이게 그 광고구나 하면서 천천히 살펴보는 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지킴이 활동을 통해 서로를 향한 지지와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8월 28일 오후 신촌역에 앉아 있을 때 어떤 분이 나와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각자 광고를 바라보며 1시간가량 앉아 있는 동안 서로 대화는 주고받지 않았지만 같은 목표를 갖고 함께 나아가는 동지로서의 유대를 느낄 수 있었다. 고생이 많다며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분들도 있었고, 음료수나 간식을 건네주는 분들도 계속 있어 나중에는 농성장을 방불케 했다. 광고판 앞에서 퀴어댄스팀 큐캔디의 공연이 이어지기도 했다. 한둘씩 찾아와 인증샷을 찍는 가운데 간간히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이 공간이 정말로 우리가 지킬 가치가 있는 곳임을 실감케 했다.
훼손된 광고 역시 재탄생하였다. 푸른색 물감은 여러 사람의 힘으로 얼룩만을 남긴 채 지워졌고 포스트잇 등이 훼손된 자리에는 다시 새로운 문구들이 붙었다. 광고판 위에 한 송이 꽃을 붙이고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문구를 적어주신 분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무성애자, 젠더퀴어, HIV 감염인, 성노동 종사자 등 다양한 정체성과 삶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포스트잇 등을 붙였다. 칠레에서 온 한 외국인 커플은 자신들의 국기 그림과 함께 스페인어로 '우리는 모두 똑같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어떤 한 분이 이야기한 것처럼 아이다호 광고는 훼손됨으로써 역설적으로 모두가 꾸미는 공간으로 재탄생하였고, 성소수자 인권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우리는 지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