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의 빌딩숲에서 배운 '어른'에 대해

'법적인 어른'이 된 지 얼마 안 된 어른의 고민들

등록 2020.10.01 18:06수정 2020.10.0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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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았지만, 어른에 대한 로망은 있었다. 이를 테면 영화 <악마는 프라다>에서 커피 심부름을 하는 주인공처럼 아침에 커피를 들고 혼잡한 교차로를 건너지 않을까, 해군범죄 수사드라마 'NCIS'에 나오는 대장 '깁스'처럼 쓰리샷(샷 3개) 아메리카노를 들고 출근하지 않을까, 하는 로망말이다.


지금 나는 어른으로 불리는 나이가 됐다. 사실 어른이 되고도 몇 해가 지났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부실공사로 지어진 환상도, 한낱 조각모음에 불과한 로망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러다 어느 날 침대에 누워 천장 벽지를 보며 생각했다. '난 정말 어른이 맞을까? 어른이라면 더 성숙한 결정을 내려야 할 텐데 난 몇 년 전이랑 다를바 없는데...'

선택과 무게

어른은 성숙하다고 생각했다. 선택의 순간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기심으로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고, 실수에는 관대하지 못해 조금만 잘못해도 핀잔을 주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주인공을 못 살게 구는 <악마는 프라다>의 비호감 편집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성숙하지 못한 선택을 반복하며 지냈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방 ⓒ unsplash


한편으로는 어른이라는 말에는 무게에 짓눌려 시간을 보냈다.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은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뜻이다. 나는 자취를 선택했고 그 책임을 온전히 져야했다. 방바닥에서 자가 증식하는 머리카락과 챙겨먹기도 힘든 끼니 사이에서 말이다. 나를 먹이고 입히는 일은, 내 몸뚱아리를 지탱하는 일은 고되었다. 내 몸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판교에서 만난 어른들

반복되는 일상과 무력감에 지쳐 있던 차에 카페 알바를 시작했다. 돈을 벌고 일을 하면 다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나는 생의 감각을 익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매장은 오피스 근처에 있어, 출근하며 커피를 사 마시는 어른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비슷한 시간대에 한꺼번에 몰려왔고, 대기가 100잔을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분들은 음료가 늦어도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같은 시간에 음료를 주문한 사람이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음료가 조금 늦어도 말없이 기다려주셨고, 심지어 내쪽에서 실수를 해도 괜찮다며 별일 아니라는 듯 넘어간 적도 꽤 있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스틸컷 ⓒ (주) 퍼스트런


수많은 손님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 매일 아침 동료와 함께 오시는 분이셨는데, 나이는 3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보통 7시 즈음 흰 셔츠에 광고회사 명찰을 차고 들어와 주문하셨다. 음료도 항상 같았다. 따뜻한 벤티 아메리카노(기본이 샷 4개 들어가는 음료)에 샷 2개 추가. 그 분은 매일 아침 샷을 6개가 든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NCIS'의 깁스를 능가하는 어른이었다.


그분이 오시고 여느 때처럼 주문도 하기 전에 포스를 찍으며 "벤티 아메리카노에 샷 2개 추가 맞으시죠?"라 확인 차 물었다. 그런데 아니라고, 3개 더 추가해 달라고 했다. 3개 추가면 7개가 아니던가. 샷 6개가 든 컵을 손에 쥐어도 무게가 상당했는데, 샷 7개면 에스프레소와 물을 일대일 비율로 섞은 것이나 다름없는 음료였다.

흠칫하며 놀란 표정으로 재확인하자 옆에 계시던 동료분도 좀 말려달라고 한 마디 하셨다. 감히 말리지는 못 하고 자초지종을 묻자 이제 샷 6개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7개로 늘렸다고 했다. 일이 얼마나 고되면 그랬을까. 쓰디 쓴 에스프레소 샷 7개 뒤에 어떤 고생이 있었을지 나로서는 가늠할 수조차 없다.

결과가 아닌 과정

그렇게 어른이 되면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쓰디 쓴 에스프레소가 익숙해지듯 매일 같이 나를 괴롭히는 머리카락과 쓰레기 익숙해질 때가 있지 않을까? 잘못된 선택을 했어도 고통스러워 하기보다는 경험을 쌓고 배웠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러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또 한참을 어른에 대해 생각했다.

그 누구도 완벽한 어른일 수는 없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0으로 태어나 100을 향해 나아간다. 이 기준은 상대적인 것이며 정도에 따라 100에 가까이 가는 사람도, 훨씬 못미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공통적으로 100에 도달할 수는 없다는 걸 우린 잘 안다. 모든 일에 통달하고 항상 옮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없으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그 실수마저 반복하기도 한다. 
 

함께 걸어갈 길 ⓒ unsplash


이렇게 어른이라는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결론을 내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느 나이가 되면 하룻밤만에 어른으로 재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통해 경험치를 쌓고 어른에 다가가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법적으로는 어른이지만 아직 진짜 어른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 할 것이다. 대신 가야 할 길이 멀고도 아득하다. 하지만 나는 판교에서 만난 어른들처럼 이 길을 걷는 사람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 다른 사람의 실수도 포용하며 100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한 발자국씩.
#어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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