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강진에 처음 유배오셔서 사셨던 곳을 기리는 기념비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강진에 처음 유배오셔서 사셨던 곳을 기리는 기념비
장생주
실제로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쓴 편지에서 자기의 책이 후세에 전해졌으면 하는 두 권의 책 중에 하나로 『상례사전(喪禮四箋)』을 꼽을 만큼 중요시하였다.
『상례사전(喪禮四箋)』은 내가 성인(聖人)의 글을 독실하게 믿고서 만든 것으로, 내 입장에서는 엉터리 학문이 거센 물결처럼 흐르는 판국에 그걸 흐르지 못하도록 모두 냇물을 막아 수사(洙泗)의 참된 학문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뜻에서 저술한 책이다.
정밀하게 사고하고 꼼꼼히 살펴 그 오묘한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게 된다면 죽은 뼈에 새 살을 나게 하고 죽을 목숨을 살려주는 일이다. 나에게 천금(千金)의 대가를 주지 않더라도 감지덕지하겠다. 만약 내가 사면을 받게 되어 이 두 가지 책만이라도 후세에 전해진다면 나머지 책들은 없애버렸다 해도 괜찮겠다.
나는 임술년(1802) 봄부터 책을 저술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고 붓과 벼루를 옆에 두고 밤낮으로 쉬지 않으며 일해왔다. 그래서 왼쪽 팔이 마비되어 마침내 폐인이 다 되어가고 시력이 아주 형편없이 나빠져 오직 안경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는 일이 무엇 때문이겠느냐? 이는 너희들과 조카 학초(學樵)가 전술(傳述)해내며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주석 3)
주석
1> 박석무, 『다산 정약용 평전』, 416쪽.
2> 이덕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2)』, 162쪽, 김영사, 2004.
3> 박석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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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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