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4는 한국인들에게 죽음의 상징이다. 건물의 층수 표기에서도 아라비아 숫자 4를 영어 이니셜 F로 대체하는가 하면 아예 한 층을 없는 공간 취급하여 5층으로 건너뛰기도 한다."
오마이뉴스
숫자 4는 한국인들에게 죽음의 상징이다. 건물의 층수 표기에서도 아라비아 숫자 4를 영어 이니셜 F로 대체하는가 하면 아예 한 층을 없는 공간 취급하여 5층으로 건너뛰기도 한다. 단지 죽음을 뜻하는 한자와 발음상 동음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음에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숫자를 이토록 배척하는 한국인의 집단정서에도 죽음에 대한 인간의 저항의지가 드러난다. 그러나 남들은 되도록 꺼리는 이 숫자를 특별히 선호하고 애용하는 기이한 직군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분하는 모든 식별번호에 숫자 4를 의도적으로 남발한다. 휴대전화번호는 물론 사업체 전화 또는 업무용, 자가용 차량 번호판에도 4라는 숫자를 끌어다 쓰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4자를 외부적으로 되도록 많이 나열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생업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해당 국번 뒤에 4자가 연달아 이어지는 통신가입자가 있다면 그 회선은 장례식장 전화임에 틀림없다. 자신들의 사업 활성화를 위해 타인의 죽음을 적극 장려하고 종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죽음을 연상하는 숫자 4를 대대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노리는 것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홍보다.
정씨가 몸담고 있는 사업장 입구 커다란 간판에도 숫자 4, 네 개가 나란히 도열하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거래를 성립하여 생업을 잇는 장례지도사다. 지인들이 업무상 관계로 거래하지 않을수록 좋은 직업인 것이다. 그러나 유사시 사람들은 그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는 누군가의 사후를 수습하는 유능한 장례지도사다.
상을 당한 상가의 상주가 상중에 실질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업무는 다양한 이동식 서류에 서명을 하는 일이다. 조문객을 맞는 기본적인 임무 외에 상주가 식의 진행에 관여하여 하는 일이 사인이라고 할 만큼 서명할 일이 많다. 장례용품지정, 옵션 선택, 접대음식 입고 확인, 화환 수령 등등 상복 입은 사람만 보면 해당 업체 직원들은 끊임없이 무언가 서명을 요구한다. 경황없는 와중에 직원이 바삐 손가락으로 짚어 주는 항목에 기계적으로 사인을 할 뿐 상주는 그 내용을 정확히 알지도 못한다. 심지어 요새는 화환업체들이 조의금 편부까지 대행하게 되면서 의뢰인의 조의금 봉투가 정확히 전달되는지를 입증할 인증 샷을 위해 상주에게 조의함 앞에서 포즈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밀려드는 조문객을 맞이하고 각종 옵션을 선택하고 서명하기도 바쁜 상주는 정작 중요한 장례절차를 챙기고 점검할 겨를이 없다. 대개 상주들에게 상주 역할은 평생에 걸쳐 몇 번 안 해본 서툰 경험이다. 그래서 실제 장례식은 전문 장례지도사들에 의해 진행된다.
장례지도사는 장례의식의 근엄한 제사장이자 유능한 행동요원이다. 의식을 집전하고 가족들을 안내하여 식을 이끌어나간다. 복잡하고 잡다한 일을 세세한 부분까지 총괄한다. 그러나 역시 장례지도사 업무의 진수는 염습이다. 안치대 위 낯선 주검으로 놓여 있는 고인의 신체를 능수능란한 솜씨로 씻고 닦고 단장해주고 염을 한다.
정 장례지도사의 직책은 사장이다. 사장으로서 장례식장의 운영과 의전을 책임지고 지금도 가끔 염습에 참여하는 등 활발하게 현장을 지휘하고 있다. 일반인들은 흔히 장례지도사하면 시신을 염하는 극한 직업만을 연상한다. 그러나 염습은 장례지도사들의 다양한 업무 중 극히 일부다. 장례지도사들은 장례식의 의전, 행정, 대외업무, 잡무, 상주 안정 등 모든 부분을 총 대행하는 전문인이다.
"아버님의 갑작스런 죽음이 계기였습니다. 아버님이 너무 이른 나이, 79세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제가 받은 고통이 너무 컸습니다. 의지하고 존경했던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니까 사는 것이 너무 허무하고 부질없어 보였어요. 그 충격과 좌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한의사라는 유익한 직업으로 평생 남의 생명과 안녕을 위해 전념한 아버지가 정작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데는 소홀하여 갑작스런 죽음의 공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걸 보면서 자식으로서 느끼는 부당하고 허무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깊은 슬픔과 절망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그는 어느 순간 아버님의 갑작스런 부재가 자신의 인생에 던지는 의미를 겸허히 되새겨보게 되었다.
대기업 부장에서 '저승사자'로
그는 아버님의 죽음을 계기로 중대한 결심을 했다. 한 대기업의 간부로 재직하면서 업무상 과로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시점이기도 했다. 대기업 부장이라는 직책은 그 이름값의 무게만큼 심리적 압박감으로 그를 옥죄고 있었다. 심신은 극도로 피폐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믿었던 아버님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허울 좋은 대기업 부장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나 훨씬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생업에 남은 인생을 바치고 싶다는 강한 욕구에 휩싸였다.
17년 근무한 직장에 과감하게 사표를 썼다. 안정된 지위, 고액연봉이 보장되는 직장을 미련 없이 버린 그가 사표를 내자마자 곧바로 재취업의 기회를 찾아 향한 곳은 장례지도사 교육원이었다. 아버님의 장례를 치르는 며칠 동안 장례식장의 장례지도사들에게 강한 인상을 받은 터였다. 슬픔에 빠진 그의 가족을 대신하여 아버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던 장례지도사들의 헌신적인 모습에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제 자신도 그들과 같은 직업으로서의 동료가 되려 하고 있었다.
파격적인 그의 전업 시도로 가장 고통 받은 이들은 당연히 가족이었다. 대기업 부장님에서 하루아침에 장례지도사 연수생으로 신분이 바뀐 가장의 변신은 평온했던 가정에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어머님의 반대가 가장 극렬했다. '내가 너를 어찌 길렀는데, 남 시신 염이나 하려고 대학공부 했나', 어머님은 읍소로 만류했다. 어머님과 형제들 그를 아끼는 주변인이라면 모두 그를 제지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런 그도 한창 예민한 사춘기 아들이 겪었을 혼란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아들을 그는 아침이면 차로 등교시켜 주곤 했는데 새 직장인 상조회사 상호가 새겨진 승용차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교문에서 멀찌감치 내려줘야 했다. 이직을 결심할 때 충분히 각오했던 난관이었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가족이 겪는 고통과 불편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 괴로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의 결심을 뒤흔들 수 있는 위치인 아내의 반응은 의외로 명쾌했다. 아내는 그의 충격적인 이직선언을 흔쾌히 받아들이는가 하면 적극 지지하기까지 해주었다.
장례지도사 교육원을 이수하고 정식 장례지도사로서 본격 업무에 투입되면서 그는 자신의 선택이 순간적 충동에 의한 무모한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단독으로 고인의 염습을 진행하던 날, 그는 인생에서 치렀던 그 어떤 시험보다 긴장되고 떨렸다. 그리고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했을 땐 온몸이 땀범벅이었지만 마음만은 평생 전념할 과업의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기쁨으로 벅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