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중인 이창훈 4?9평화통일재단 사료국장
서울청년진보당 대학생위원회
외세가 낳은 국가보안법: 치안유지법과 국방경비법
국가보안법에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같은 해에 제정되었으니, 대한민국과 역사를 같이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의 토대는 그보다 이전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치안유지법과 미군정 시기 국방경비법이 바로 그것이다.
치안유지법은 1925년 일본에서 사회주의 탄압을 위해 제정되었다. '국체를 변혁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고 활동하는 이들을 처벌하는 치안유지법은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에도 적용되었다. 사상범을 통제한다는 목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이는 데에 활용된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연좌제를 적용하여 처벌 대상 본인뿐 아니라 그 가족까지 구속 대상으로 삼은 것은 치안유지법과 꼭 닮은 부분이다.
일제가 치안유지법을 만들었다면, 미군정은 국방경비법을 만들었다. 철저한 반공주의하에 친일파를 주요 인재로 기용했던 미군정은 여운형, 김원봉 등의 인사들이 좌우합작을 통해 친일파를 배제한 정부를 세우려는 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 과정에서 국가보안법과 국방경비법 등이 만들어졌는데, 박정희 정권은 국방경비법을 톡톡히 활용했다. 세계 최장의 수감 기록을 가진 김선명씨뿐 아니라 수많은 장기수가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수십 년의 옥살이를 했다. 이창훈 국장은 "실내용을 보면 (국방경비법은) 간첩 잡는 법이 아니라 간첩 만드는 법이었다"며, 다행히 최근에는 재심으로 무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정권 유지를 위한 최고의 수단, 국가보안법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내건 혁명 공약 1호는 반공을 국시로 삼는 것이었다. 정권을 잡은 지 불과 한 달 만에 박정희 정권은 반공법을 제정했다. 국제적인 냉전의 영향은 한반도를 비껴가지 않았고, 정권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내란음모·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기고한 글이나 작품 등을 빌미로 지식인들을 잡아들였던 필화사건 등이 반공법을 활용한 탄압의 대표적인 예다.
박정희 정권 이후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유화 조치의 일환으로 반공법을 폐지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반공법의 내용이 국가보안법으로 옮겨간 것에 불과했으며, 오히려 이를 계기로 국가보안법은 80년대부터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국가보안법은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치며 강화되기도, 약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 세력을 제압하는 데에 활용되었고, 그 결과 입맛에 따라 어떻게나 적용할 수 있는 법이 되었다. 이창훈 국장은 "지금도 국가보안법은 (같은 사건이라도) 검사와 재판장의 성향에 따라 무죄가 되기도, 유죄가 되기도 한다"며 "국가보안법이 없어지지 않으면 반인권적인 법 집행이 사라질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