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4.3 기념관에서 찍은 박진경 대령 관련 자료 사진.
박기철
박진경은 일본육군공병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전에는 제주도의 일본군 38군단에서 복무했다. 입대 전에는 오사카 외국어 대학에서 영어과를 다녔다. 이 덕분에 해방 이후 주둔한 미군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사실 미국은 그를 '극우주의자(the extreme rightist)'로 평가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미군의 자존심을 조속히 회복시켜줄 적임자이기도 했다. 박진경은 부임하자마자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제주도의 서쪽에서 동쪽까지 빗질처럼 완전히 휩쓸어 버리는 형태로 작전을 진행했다.
그야말로 무차별적인 토벌과 체포였다. 군은 6주 만에 무려 약 6천 명을 체포했다. 체포된 이들 중에는 물론 무장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중학생과 노인을 포함해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무차별적인 강경 진압 때문에 주민들은 더 숨고 도망쳐야 했다. 죄가 없는데 왜 도망치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토벌대는 그런 것을 묻지도 않았고 얘기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박진경의 대령 진급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은 덕분이었다.
9연대의 병사들, 그리고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당시 조선경비대는 지역별로 연대를 창설했고 병사들은 인근 지역에서 모병해서 채웠다. 그러다 보니 9연대에는 제주 출신 장병들이 많았다. 그들은 고향에 대한 이런 무차별적인 토벌 작전에 괴로워했다.
이렇게 무리하고 잔인한 작전이 계속되자 결국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일련의 군인들은 박진경 연대장을 살해하기로 뜻을 모은다. 그리고 박진경의 대령 진급 축하 만찬이 끝난 후 술에 취해 잠든 박진경을 향해 손선호 하사가 방아쇠를 당긴다. 이런 전후 사정 때문에 이들의 구명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손선호는 재판 과정에서 박진경을 살해한 이유를 말하면서 무차별적인 민간인 체포와 학살을 담담히 진술했다.
박 대령의 작전 공격은 불만하였다. 사격 연습을 한다고 하고 부락의 소 기타 가축을 박살하였으며, 폭도의 처소를 안내하는 양민을 총살한 예도 많다. 또한 매일 한 사람이 한 사람의 폭도를 체포하라는 등 부하에 대한 애정이 전연 없었다. (조선일보, 1948년 8월 15일, '4명 총살 언도 / 태연한 피고, 박 대령 비행 진술')
또한 아버지의 시체를 끌어안고 있는 15세 소년을 박진경이 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박진경을 살해한 것은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었기에 도망갈 기회가 충분히 있었으나 도망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상길 중위는 전임 김익렬 연대장이 평화교섭을 추진할 때 무장대와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문상길이 좌익이나 남로당의 프락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황상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정부에 반감을 품거나 토벌대의 무리한 작전에 반대하면 모두 빨갱이로 몰리던 시기였다. 또 전후 사정을 잘라내고 '빨갱이였기 때문에 토벌대 지휘관을 죽였다'라는 주장이 양민들에게 행했던 박진경의 무자비한 만행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상길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체포 후에는 여러 기독교 단체에서 구명운동을 펼쳤다. 문상길의 법정 진술은 그의 종교관과 신념을 잘 보여준다.
(전략)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김용옥, <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240쪽)
문상길과 손선호는 '훌륭한 조선의 군대가 되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948년 9월 23일 오후 3시 35분 총살당했다. 그들의 나이는 각각 23세, 22세였다.
30만 vs 30만
박진경 추모비 뒤에는 그의 생애가 간략히 나와 있다. 거기에는 '제주도 공비소탕'의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산화했고 이를 기리기 위해 '삼십만 도민과 군경원호회가 합동하여' 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박진경은 9연대 연대장 취임 연설에서 '제주도 30만을 다 죽여서라도 빨갱이를 몰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도민 30만 명이 뜻을 모아 자신들을 다 죽여버리겠다던 자의 추도비를 세운 것인가? 박진경이 말한 30만과 추모비의 30만은 다른 사람들인가? 추모비의 내용을 보고 있자니 한 편의 블랙코미디 같아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 시민사회에서는 추모비 철거를 계속 주장해왔고 2018년 제주시는 묘역 공사 후에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추모비 뒷면에 기록된 박진경의 생애 (전략) 제주도 공비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히도 단기 4281년 6월18일 장렬하게 산화하시다. 이에 우리 삼십만 도민과 군경원호회가 합동하여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단갈을 세우고 추모의 뜻을 천추에 기리 전한다.
박기철
[참고자료]
김용옥, <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통나무
박태균, <사건으로 읽는 대한민국>, 역사비평사
임영태, <한국에서의 학살 - 한국 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통일뉴스
허영선,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서해문집
제주 4.3 아카이브(과거 신문기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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