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강경포구 전경옥녀봉 아래 논산천이 금강으로 흘러 드는 곳으로 추정된다. 강경포구에는 매일 큰배 100여척이 정박하고, 시장에는 상인 1만여 명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에 촬영된 사진을 통해, 이 시기에 이미 쇠락한 강경포구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논산시청
굽이쳐 흐르는 금강 물줄기로 보아, 강경은 곡류하천 측방침식이 일어나는 곳에 입지하였다. 단단한 암반이 하상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포구 앞 수심은 깊고 물 힘이 세, 흙이 퇴적되지 않는다. 그만큼 강기슭 항구인 '하항(河港)'으로써 천혜의 요건을 갖추었다. 강폭은 400m가 넘어 큰 배가 정박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서해를 오르내리는 갖은 물산이 강경으로 몰려든다. 내륙 하항으로 원산과 더불어 조선 2대 포구이며, 대구·평양과 더불어 조선 3대 시장으로 이름을 떨친다. 백여 척 이상 커다란 상선(商船)이 늘 드나들고, 하루 1만여 명 상인들이 북적인다. 전라·충청 내륙의 물산과, 서해·남해에서 잡힌 물고기들이 주요 품목이다. 중국으로 들고 나는 물건들도 지천이다. 강경에선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고 육로와 수로, 해로를 이용하기엔 최적의 도시다.
1899년 호남평야 미곡을 강탈하려는 일본이 군산을 개항시킨다. 강경 항구기능을 확대하는데 군산 개항도 큰 몫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05년 을사늑약과 함께 경부선이 가설되자 물을 이용하던 물류 흐름이 급격히 철도로 옮아간다.
그 중심에 대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과 가까운 강경은 이전 도시세력을 비교적 잘 유지해 낸다. 하지만 강경 주변에도 급격히 철도가 늘어난다. 대전∼강경선(1911), 익산∼군산선(1912)에 이어, 1914년 호남선이 완공된 것이다. 이로 인해 강경의 항구기능이 급격히 퇴화하기 시작한다. 낙후되고 느린 선박이, 빠른 철도를 따라 잡을 순 없었다. 결정적으로 1931년 장항선까지 개통된다.
한국전쟁 땐 시가지 70% 이상이 파괴되어 버린다. 차가운 자본은 쇠락한 포구에 눈길조차 건네지 않는다. 재생(Renewal)이 안 된 것이다. 이제 바닷가 작은 포구만도 못하게 되었다. 1970년 대 중후반을 전후하여 국제항 기능을 하던 군산항도 급격히 퇴화해 간다. 막대한 퇴적토가 항로에 쌓여, 큰 배를 접안시키기가 점차 힘들어 진다. 두 도시의 항구 기능이 덩달아 쇠락해 간다.
강경으로 몰리던 물산이 급격히 줄어들어, 포구로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 1990년 금강 하구를 둑으로 막아버림으로써, 강경은 하항(河港)기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만다. 젓갈 등 일부 특화된 물산으로 옛 명성을 유지하는 한적한 도시로 퇴락하고 말았다. 화려했던 과거의 흔적만 쓸쓸하게 남아있다. 옛 영화(榮華)의 흥청거림이 금강 물결로 넘실거린다. 강물은 여전히 유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