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지금 고민을 품어주는 풍경들

등록 2020.11.03 10:57수정 2020.11.0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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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 같이 읽는 친구 모임이 있다. 지난 정모 끝 무렵, 한 친구가 금산사로 단풍을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 자리에서 망설임 없이 날을 잡았다. 2주 후 금산사 주차장 오전 10시. 친구들은 각각 전주에서 김제에서 출발했고 난 군산에서 출발했다. 두 친구는 못 가게 되어 아쉬운 마음을 김밥으로 스폰해 주었다.


친구 수 대로 계란을 삶고 소금을 챙기는 건 기본이다. 걸으면서 먹을 간식으로 초콜릿과 오이를 장을 봐놓아 씻고 썰고 한다. 운전 소요 시간과 산책 코스 검색도 해놓아야 한다. 가서 꼭 봐야 하는 것과 근처 맛집 리스트도 빠트리지 않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금산사에 대한 선지식을 알고 가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검색하면 다 나오니 어렵지 않다. 고려시대라던가 조선 어느 왕 몇 대 어쩌고저쩌고 썰을 풀어주면 여행이 꽤 제법이다. 비록 끝나면 막바로 까먹을지언정 사찰 용어도 미리 찾아보면 재밌는 것이 많다. 그래서 친구들은 나와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이가 드는 건가. 이번에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어느 것 하나 하기 싫은 건 아니지만 안 하는 것이 편하다는 걸 몸이 자꾸 말하는 것 같다. 심지어 뭘 믿고 운전시간 체크도 대충 하는 둥 마는 둥 잠들다니. 도착 시간에 늦기까지 했다.
 
금산사 단풍 소화전 피해서 근사한 풍경 사진 찍기는 쉽지 않다.

금산사 단풍 소화전 피해서 근사한 풍경 사진 찍기는 쉽지 않다. ⓒ 황승희

 
나의 미안함은 안중에도 없이 우리는 날씨에 넋이 나가버렸다. 알고 있는 최고의 감탄사들을 토해냈다. 노랑 단풍에 황홀해하면서 김밥을 먹던 벤치는 일어나고 보니 고흐의 그림 한 장면이었다.

금산사 구석구석을 발길 닿는 대로 가볍게 걸었다. 이게 '갑석'이라 하고 저거는 '귀부'라는 나의 부연설명 따위 필요는 없었다. 건축 양식이라던가 사대천왕에 대해 할 말은 없지만 표지판도 적당히 읽고 사진도 찍었다. 알고 보고 알고 찍는 지적 충만함이 없어도 괜찮은 여행이다라고 오늘 하나 얻었다.

얻은 것 말고 달라진 게 한 가지가 더 있는 것을 알았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마스크를 착용해주세요'라는 표지판이 금산사 곳곳에 어디라도 붙어 있었다. '조용히 해주세요' '신발 벗고 들어가세요'와 함께 이젠 절과 자연스러운 풍경이 돼버린 듯하다.


나의 시선이 불상에 닿으려면 먼저 불상 앞 기둥에 잘 붙어있는 마스크 표지판을 거쳐가야 한다. 소화전 피해서 근사한 풍경 사진 찍기 힘들 듯이 마스크 안내판 피해서 사찰 내부 사진 찍는 건 이젠 불가능한 시대인가? 
 
금산사 풍경만 저 혼자 아름답느라 바쁘다.

금산사 풍경만 저 혼자 아름답느라 바쁘다. ⓒ 황승희

 
금산사 마당 너른 바위에 앉았다. 마당과 사찰이 다 보이는 안온함을 마지막으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인생살이 큰 능선을 넘는 사십 대 느즈막. 그 나이의 고민들이 나왔다. 인생의 고민은 어쩌면 그다지도 처마 단청무늬처럼 다채로울까. 새삼 인간사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사찰처럼 호젓하게 맘 편히 살 수는 없을까.

우리 고민 앞에서 금산사는 금세 배경이 돼버렸다. 우리의 고민과 응원과 위로가 금산사 가을 햇살과 단풍 사이 그 틈을 채우고 있었다. 이런 걸 흘려놓고 가서 풍경에게 송구하기도 했다. 단풍놀이 여행기를 가장한 우리의 사는 이야기 에세이였다.
 
금산사와 친구 친구의 답답한 고민과 아름다운 풍경

금산사와 친구 친구의 답답한 고민과 아름다운 풍경 ⓒ 황승희

 
답 없는 고민들과 이 풍경은 서로 물과 기름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풍경만 저 혼자 아름답느라 바쁘다. 마치 자 자신이 답이라는 듯이. 어차피 각자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고민들이지만 들어줄 친구가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도움을 주고 싶어서 뭐라도 추천해 주려고 애쓰는 친구들이 마치 미륵전 삼존불상처럼 존귀하게 보였다.


더구나 사찰에서 나누는 고민이라서 일까. 우리의 우정이 한껏 품격 있게 느껴졌다. 금산사가 우리 고민을 다 품어주는 것 같았다. 풍경의 효과인가. 답답하기만 한 고민이 단풍에 물들어 말랑말랑 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일을 믿고 싶어지는 좋은 하루였다.
 
금산사와 우정 사찰에서 나누는 고민이라서 일까 우리의 우정이 한껏 품격 있게 느껴졌다.

금산사와 우정 사찰에서 나누는 고민이라서 일까 우리의 우정이 한껏 품격 있게 느껴졌다. ⓒ 황승희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금산사 #우정 #단풍 #풍경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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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두 마리 고양이 집사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부모님과 밭농사일을 하고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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