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공원지키기 캠페인을 하고 있는 이철로 활동가
문세경
"엄청나게 기뻤어요.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하는 이유는 사회변화를 위한 것도 있지만, 활동하면서 연대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가장 커요. 서로 믿고 공감하고 동질감이 생기고. 이 동질감이 오래가야 다른 문제가 생겼을 때 뭉칠 수 있거든요. 만약에 한남공원 찾기가 잘 안 되었어도 함께한 주민들과 연대감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거라고 생각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긴 거예요.
한남공원을 되찾은 일은 삼박자가 잘 맞았어요. 능력 있는 간사인 저(웃음)와 설혜영 구의원(정의당) 그리고 뜻을 모은 시민들이 잘 뭉쳤기 때문이에요. 그때 함께한 사람이 2천 명이에요. 밴드를 만들었어요. 밴드에 가입한 회원은 200명 정도 돼요. 생태환경 정보를 교환하고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환경과 생태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어요.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못 만나서 슬퍼요."
한남공원이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기뻤다. 되찾는 과정에서 서울시와 용산구가 비용 문제로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한남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공원'이기 때문에 없어지면 안 된다는 서울시의 의지가 컸다.
이철로 활동가가 말했듯이 혼자였거나 하나의 시민단체로만 움직였다면 못 했을 일이다. 삼박자를 잘 맞췄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고 뿌듯했을까. 인터뷰 도중 다시 한번 축하를 전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은퇴하기 3년 전부터는 부산에서 일했어요. 사무실 근처에 있는 환경단체 간판이 보였어요. 찾아갈까 하다가 용기가 없어서 못 갔어요. 그때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를 매주 할 때였어요. 서울에 가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렸죠. 가끔 집회 참여하러 서울에 가긴 했지만.
은퇴를 했지만 여전히 돈 들어갈 일이 있어서 일을 해야 했어요. 용돈도 벌어야 하고(웃음). 운전하는 것에 자신이 있어 택시를 몰려고 택시기사 자격증을 땄어요. 그런데 한남공원 지키기 간사로 활동하다 보니 택시 몰 시간이 부족했어요. 할 일이 너무 많았거든요.
현수막도 주문해서 걸고, 유인물도 한남역 앞에서 혼자 나눠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저를 주민들이 불쌍하게 여겼는지 한 분, 두 분 도와주기 시작했어요. 공원 지키기 서명을 받고 나서 보니까 2천 명의 시민이 참여했더라고요. 감동이었어요."
늦깎이 활동가
오랜 직장생활을 끝내고 은퇴를 하면 자유를 만끽해도 모자랄 때다. 이철로 활동가는 어떤 이유로 다시 활동가의 삶을 선택했을까. 그 사연이 무척 궁금했다.
"저는 유신시절에 대학교를 다녔어요. 학생운동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학교에서 거의 전설이었어요(웃음). 주동자였으니까. 그때는 유신시절이어서 모일 수가 없잖아요. 모이기만 해도 구속이니까. 중국집, 다방, 친구 집 등에서 몰래 모였어요. 그렇게 활동하다가 졸업을 못 했어요.
이후 공장에 취업했어요. 위장 취업이었죠(웃음). 1987년 6월 항쟁이 터지고 공장을 떠났어요. 굳이 내가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한 학기가 모자라 졸업을 못 했는데 나중에 복교령이 떨어져 겨우 졸업했어요.
1학년 때, 교양과목 중 '현대사상의 비판'이라는 과목을 들었어요. 공산주의의 가치관에 대해서 쓰라는 시험을 봤어요. 저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긍정하는 답을 썼거든요. 교수의 입장에서는 공산주의를 나쁘게 써야 하는데 좋게 쓰니까 사상이 불순한 놈이라면서 몽둥이로 때리고 강의실에서 쫓아냈어요. 그리고 신고한다고 했어요. 그 일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혀서 아버지가 교수에게 싹싹 빌었어요.
아버지는 교수에게 저를 군대에 보낸다고 하고, 교수는 저를 군대에 보내지 말라고 했어요. 군대에 가면 바로 '적색분자'가 되니까 자기에게 맡기라고. 자기가 교화시킨다고. 그 일이 있고 난 후, 교수에게 머리를 숙였어요. 더 나대면 식구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생각하면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죠. 몇십 년 지나고 같이 수업 들었던 친구들이 그때 저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버지가 공무원이어서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본인 때문에 아버지 직업에 문제가 생기면 그 파장은 고스란히 가족들에게 미치니까.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친구들과 몰래 모여서 학습을 했다. 당시에는 국문으로 된 학습서가 많지 않아서 영문 책을 번역해가며 활동의 지침서로 삼기도 했다.
말년에 터진 일복
이철로 활동가는 요즘 또 다른 일에 발을 담갔다. 용산구에 '노동권익센터'를 만드는 일이다. 지난 5월 10일,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노동자가 주민의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숨진 일이 있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시작한 일이다. 서울시 각 자치구에 의무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노동자종합지원센터가 용산구에는 없다.
요즘 이철로 활동가는 발이 부르트도록 지역의 경비노동자와 비정규 노동자를 만나러 다닌다. 이번에도 '간사' 역할을 맡았다. 은퇴 후 활동이 다시 대학 새내기로 돌아간 것처럼 설레지만, 힘들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