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초대 책임 비서 김재봉(1890~1944)
안동대박물관 편 <근대 안동>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은 1918년 4월, 이동휘(1873~1935, 1995 대통령장) 등이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결성한 한인사회당이었다. 이동휘는 3·1운동 뒤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부임해 1920년 중엽, 소련과의 관계 강화를 통한 무장투쟁을 위해 임정의 전면개편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임정을 떠나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였다.
한편 1920년 1월,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된 러시아 볼셰비키 당의 한인 지부인 '이르쿠츠크 공산당 고려부'(위원장 김철훈)는 이듬해 5월, 또 다른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이후, 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은 '상해파', 김철훈의 이르쿠츠크 공산당은 '이르쿠츠크파'로 불리게 되면서 당 창립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코민테른(1919년 모스크바에서 결성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 조직,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이들의 통합을 요구했지만, 갈등이 이어지자 1922년 '코르뷰로(고려부, 고려총국)'를 설치하고 국내에 통일 당을 건설하라는 최후통첩을 내리며 '두' 고려공산당을 해체하였다.
1923년 고려총국은 국내에 당 건설을 추진하라며 대표 두 명을 파견했다. 고려총국 국내부 책임 비서 김재봉(1890~1944)과 공산청년회 책임 비서 신철이었다. 그리고 2년 뒤, 서울에서 건설된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 비서가 된 김재봉은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출신이었다.
넉넉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김재봉은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다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 경성공업전습소(경성고등공업학교의 전신, 해방 후 서울대 공대로 재조직) 염직과 3년을 마치고 귀향한 그는 오미마을에서 강습소를 열어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전수했다.
풍산 김씨 동족 마을인 오미마을은 24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동네다. 상해 임정에서 활동하다 뒤에 남만주 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한 김응섭(1876~1957)이 당숙뻘로 옆집에 살았고, 동경 니주바시(二重橋) 투탄 의거의 주인공인 의열단의 김지섭(1884~1928, 1962 대통령장),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김만수(1892~1924, 1963 독립장) 등도 한 집안이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김재봉은 서울로 와 <만주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인척 안상길이 임시정부의 경상북도 연락책임자로 돌아오자 동향의 이준태(1892~?)와 함께 임시정부 선전과 자금모금을 벌였다. 1921년에 일경에 체포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갓 독립운동에 투신한 민족주의자였을 뿐이었다.
김재봉이 사회주의자들 가운데서 새롭게 떠오르게 된 것은 1921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서였다. 모두 9개국 144명이 참석했는데 한인은 의장단에 선출된 김규식(1881~1950, 1989 대한민국장)과 여운형(1886~1947, 2008 대한민국장)을 포함하여 무려 56명이나 됐다. 이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모색하거나 우호적 입장을 견지했던 세력들이,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해 적극적 지원을 표명한 소련과 코민테른으로부터 지원을 기대하면서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20년 창립된 노동단체 '조선노동대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김재봉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원 대회 개최 장소였던 이르쿠츠크를 거쳐 장소가 바뀌어 모스크바로 온 그는 2월에 대회가 끝난 뒤에도 귀국하지 않았다. 그는 극동의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르며,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3년 5월, 김재봉은 15개월 만에 국내에 당과 공산청년회(공청)를 조직하라는 밀명을 띠고 서울로 돌아왔다. 한 달 뒤, 그는 국내 조직인 상해파와 조선노동연맹회, 북성회, 무산자동맹회와 함께 코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고 당 조직 책임 비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