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돌의 산중일기.2 <청숫잔 맑은 물에>
리토피아
그는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부모님이 지어주고 평범한 삶을 살던 날의 이름 용현, 민주화 운동을 하며 의롭고 용기 있게 불의와 맞선 청년으로 살았던 요한, 그리고 홀연히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자연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씨돌. 서로 다른 이름이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하나다.
그의 본명은 용현이고 세례명은 요한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가족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례명인 요한으로 살았다. 자신의 역할이 끝나자 그는 홀연히 강원도 정산의 첩첩산중으로 돌아가 자연인 씨돌이 되었다.
그의 이력을 보면 평범한 삶의 모습이 아니다. 자신을 위한 삶보다는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는 이 땅에서 제대로 된 졸업장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서울대와 경찰대 등의 폐지론을 처음으로 대자보화 했다. 제주에서 심신장애인들의 재활마을인 '사랑과 나비의 집' 운동을 펼치다 조사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국회 군의문사사건의 중심에 서서 활동을 한다. 이때 그의 이름은 용현이 아닌 요한이었다.
군의문사사건의 중심에는 시대의 아픔이 그대로 드러난다. 1987년 정연관 상병이 대통령 부재자 투표에서 당시 여당 후보인 노태우를 찍지 않고 야당 후보를 찍었다는 이유로 구타당해 숨졌다는 의혹을 파헤치면서 그의 삶에서 의문사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는 '천주교 공정선거 감시단'으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을 하다 의문사한 유가족들과 어울렸다.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서 투쟁을 하다 구타를 당하여 죽음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또 간첩으로 오인받아 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며 끝까지 싸웠다. 그러다 어느 날 요한은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2004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정연관 상병의 의문사가 인정된 후다. 자신의 할 일을 마친 후 그가 선택한 곳은 강원도의 한 깊은 산골이다.
그는 여러 일을 하면서도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곳엔 어김없이 나타났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을 때 자원봉사 팀장을 맡아 매몰돼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조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자연을 지키는 일이나 사람을 지키는 일이 있으면 그는 늘 앞장섰다. 이러한 삶의 모습들을 생각하며 그의 책을 찬찬히 읽다 보면 그가 왜 그러한 삶을 선택했는지, 그의 영혼이 얼마나 맑은지 알 수 있다.
사설조의 문장에 들어있는 풍자와 해학
<청숫잔 맑은 물에> 나타난 씨돌의 글은 시 또는 동시이기도 하고 사설이기도 하다. 넋두리 타령이기도 하고 맑은 내면의 노래이기도 하다. 그 속에 풍자와 해학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그래서 처음 책장을 편 독자는 낯섦을 느낄 수도 있다. 내가 처음 책을 펼쳤다가 책장 속에 한참 동안 가두어 놓은 것도 어쩌면 그 낯섦 때문인지 모른다.
산이 있어? 있다면? 잘못된 거야! 죄진 놈 명도 길어요. 먹을 것도 많아요. 이제 이스라엘은 성노예 반성조차 안 해요. 팔레스타인 학살에 믿음 보장법도 다 있어요. (……)
말씀으로, 학벌로, 뇌물로, 말아먹는 세상에,
집을 잃고 고향 떠나 설움 많은 세상에
부모형제 가족 떠나 눈물로 지세우시고,
같은 종족이 아니고,
같은 피부가 아니라고,
같은 종교가 아니라고, 버림받으시고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 아니라고,
특별히 선택된 직업이 아니라고 밟히시고,
깊은 산골에 홀로 살면서, 새들과 이야기하고 나무와 꽃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잘못들을 토설한다. 자연의 이치와 어긋나는 인간 세상의 모습들을 타령하며 애원을 하기도 한다. 측은지심 가득한 마음으로. 그래서 힘들고 지치고 짓밟힌 것들에게 '한 번쯤 우리 어머님의 아픔으로 껴안아 주고, 서로서로 슬픈 사연들 어루만져주시라'고 말한다.
<청숫잔 맑은 물에>는 씨돌, 요한의 외침의 소리다. 정제되지 않은 듯하면서 정제된 둔탁한 영혼의 소리들로 가득하다. 그는 자유로운 토끼이고 새이고 나무이고 나물 캐는 아줌마이고 지게에 나무를 지고 가는 나무꾼이기도 하다. 80년대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글귀 중에는 지금의 모습을 역으로 볼 수 있는 구절들도 있다.
"아, 진정 용기 있고 가슴 시린 진실을 그대로 담아냈던 그 시절 기자분들은 다 어디에 계시온지."
씨돌씨는 이제 산중에 없다. 새들에게 모이를 주고, 토끼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산에 있는 나무와 꽃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호탕하게 웃던 씨돌씨는 용현씨가 되어 강원도 정선의 한 요양병원에 누워있다.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영상을 보면서 그가 없는 산중에 새들은 토끼는 무엇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가 낙서처럼 툭 던진 이 한 마디가 그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흔적도 남기지 말아라."
청숫잔 맑은 물에 - 산도라지 / 김씨돌 산중일기 2
김씨돌 (지은이),
리토피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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