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경신참변' 독립군기반 상실 위기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 29회] 일제의 참혹한 보복전이 전개되었다

등록 2021.02.04 17:56수정 2021.02.04 17:56
0
원고료로 응원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1920년 12월 5일자 <매일신보>기사 경신대학살 관련 사실을 일제의 입장에서 왜곡 보도하고 있다. ⓒ 매일신보

 
최운산 부대와 연합군이 간도를 떠난 후 일제의 참혹한 보복전이 전개되었다. 경신참변, 경신대학살, 간도대학살 등으로 불리는 일본군의 재만 동포 학살은 기록에 따라 3,500명에서 5,000 명에 이르는 대참변이었다. 

일제의 『조선통치사료』에는 일제가 당시 간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간도는 재외불령조선인 단체의 모든 세력을 집중하고 있는 곳이며, 동지(同地)에 있는 각 불령 단체의 무력은 조선 독립을 표방하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위력의 거의 전부라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상해임시정부도 이와 같은 간도의 무력단체를 배경으로 점차 그 존재를 인정하며, 또 조선 내에 있어서도 무식한 자들은 간도에 있는 무력단체의 세력을 과신하는 관계로 독립의 가능성을 믿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간도에 있는 불령선인단은 조선 내의 치안유지상 제일 중시하여야 할 것이다. (주석 4)

  

1922년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할 당시 사진(출처 : 반병률 교수) 최운산 장군(가운데)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인물이 여운형(왼쪽)과 함께 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입수 발굴한 반병률 교수는 최운산 장군(가운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 반병률

 
두 차례 전쟁에서 참패한 일제는 간도 거주 한인들에 대한 야수적인 보복으로 나타났다 재만 한인들이 독립군들의 '지원부대' 역할을 한데 대한 분풀이였다. 이참에 독립군의 근거지를 초멸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봉오동ㆍ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대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 동포들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빨치산 활동이나 게릴라는 주민과 '물고기와 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치 그대로였다.

한국독립군을 쫓아 시베리아 쪽에서 남하하는 일본군과 나남에서 북상하는 일본군은 도로변이나 산골 마을을 가리지 않고, 한인 마을을 수색하여 청년들은 보는 대로 사살하고, 여성들을 강간하며 가옥에 방화하는 등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간도 일대에서 일본군에 학살된 한국인은 3,469명이고, 이를 전후하여 3, 4개월 동안에 걸쳐 학살당한 한국인을 합하면 약 5,000여 명에 달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당시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을 목격한 미국인 한 선교사는 "피에 젖은 만주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하였다.  

역사책에서 흔히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같은 해 만주 훈춘에서 있었던 '훈춘참변'과 함께 우리 동포가 만주지방에서 일제에게 당한 가장 대규모적이고 비극적인 참변이었다. 간장암동의 한국인 학살 참변은 일제의 기록에도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특히 10월 30일 아군대(일군)의 한 부대가 연길 장암동(獐岩洞)에서 불령선인 토벌에 즈음하여 36명을 살해하고 민가 12호 및 학교ㆍ교회당을 불태운 사건을 듣고 피등(彼等) 선교사는 익(翌) 31일 해지(該地)에 가서 사진기로 피해 상황을 촬영하고(사체에 밤 껍질을 덮어 태웠으나 반만 타서 숯이 되어 있는 것을 촬영하였다고 한다) 조위금 2백 원을 보냈으며, 또한 전후 수차에 걸쳐 선교사 및 신문기자가 이를 조사한 것은 사실이다. 본 건은 학살사건으로서 행여 선전의 불을 붙이는 단서가 될 지도 모르므로 크게 경계를 요하기에 군대측에 특별히 주의를 주고 있다 (일본 제19사단사령부, 『간도출병사』).

한국독립군에게 참패한 일본군은 보복으로 무차별 한인학살 작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한국인 마을을 포위, 습격한 뒤 모든 남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총이나 창으로 학살하였으며, 부녀자들은 보이는 대로 겁탈하고 살해하였다. 민가를 소각하고 가축을 약탈하여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1920년 말까지 3개월간 집중적으로 학살이 자행되었고, 그 후에도 잔류부대가 다음 해 3월까지 학살과 겁탈을 계속하였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앞에서도 잠깐 소개한 간장암동 주민의 희생이 가장 컸다. 그 해 10월 30일 스즈모토 대위가 인솔한 일본군 토벌대 77명이 용정촌 동북 25리 지점에 위치한 한국인 기독교 마을인 간장암동을 포위했다. 이들 일본군은 마을 주민을 교회당에 집결 시킨 후 40세 이상의 남자 28명(10~30세 남자는 독립군으로 간주되었으므로 피신했다)을 포박지어 꿇어앉힌 다음 아직 타작하지 않은 조짚단을 교회당 안에 채워 놓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일본군인들은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을 모두 칼로 찔러 몰살시켰다.

일본군이 돌아간 뒤 가족들은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그런데 5~6일 후에 그 일본군이 다시 마을을 습격하여 유족들을 모아놓고 무덤을 파헤친 후 시체를 한데 모으라고 강요했다. 유족들은 위협에 못 이겨 언 땅을 파 시체를 모아놓으니, 다시 시체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질러 시체가 재가 될 때까지 태워버렸다. 이렇게 이중으로 학살 당한 시체는 누구의 것인지도 가릴 길이 없어서 유족들은 재를 모아 28명의 합장 무덤을 만들어 성분하였다. (주석 5)

  

최운산 장군 (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연변박물관에 전시된 최운산 장군 초상화.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연길현 의란구(衣蘭溝) 남동(南洞) 마을의 학살도 이에 못지않았다. 이 마을은 이씨 성의 30여 호가 사는 집성촌이었다. 일본군이 마을을 습격하여 이씨 성이 아니라고 변성한 3명을 제외하고 모든 촌민을 몰살시켰다. 대부분 총을 쏘아 죽이거나 총탄이 아깝다면서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

어느 4형제는 함께 밧줄에 묶인 채 불타는 가옥에 던져지기도 했다. 또 수십 명의 일본군은 12월 6일 연길현 와룡동에 살던 교사 정기선을 연길현 구수아(九水阿) 신흥동으로 끌고 가 독립군의 은신처를 대라고 신문하였는데, 얼굴 가죽을 몽땅 칼로 벗겨도 말을 듣지 않자 두 눈을 칼로 도려내어 누군지조차 알 수 없는 육괴(肉塊)로 만들기도 했다.

연길현 팔도구(八道溝)에서는 어린아이 4명을 모두 칼로 자살(刺殺)했고, 같은 현 약수동(藥水洞)에서는 피살된 시신을 다시 불에 태운 후 강물에 던졌다. 여성들을 체포하면 으레 강간한 후 살해했는가 하면 2, 3세 되는 어린애를 창끝에 꿰어들고 울부짖는 비명을 들으며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우즈다 중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22명은 같은 해 10월 20일 명동촌(明東村)을 습격하여 마을을 폐쇄한 후 모든 주민을 명동학교 교정에 모아놓고 "이 학교는 역연(歷然) 불령단 양성의 원천으로서 교장 김약연 및 마진이 두목이고 최근까지 항일 근거지였으므로 근저(根底)는 전복, 화(禍)를 끊는다"라는 구실로 이 학교를 불태웠다. 일본군은 이어 명동교회와 교사들의 가옥도 불태웠다. (주석 6)


주석
4> 김정주 편, 『조선통치사론』8권, 「간도에 있어서 불령선인단체의 상황」, 250쪽, 1970.
5> 『간도독립운동소사』, 100~101쪽, 발췌.
6>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AD

AD

AD

인기기사

  1. 1 80대 아버지가 손자와 손녀에게 이럴 줄 몰랐다
  2. 2 한국에서 한 것처럼 했는데... 독일 초등교사가 보내온 편지
  3. 3 임성근 거짓말 드러나나, 사고 당일 녹음파일 나왔다
  4. 4 저출산, 지역소멸이 저희들 잘못은 아니잖아요
  5. 5 '독도 보고서' 쓴 울릉군수, 횡성에서 면직된 이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