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아대에 인천국악인들이 모였다. 인천 국악의 거장인 이두칠(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네번째)도 자리를 함께 했다.?
아이-뷰/자료사진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렸다. 레슬링의 장창선 선수가 은메달을 땄는데, 장창선 선수는 인천 신흥동에 살았다. 신흥동 1가엔 '우리동네 장사났네'라는 커다란 아치가 세워졌다. 허봉조를 비롯한 몇몇 인천 여성리더들은 장창선의 어머니에게 쌀 한 가마니를 선물했다. 당시 인천사람들은 풍물을 치면서 개선장군 장창선을 환영했다.
지금의 기독병원 건너편에 자리한 허봉조산부인과 건물은 당시 인천에선 매우 잘 지은 건축물이었다. 인천의 오래된 건축으로서 가치가 있었던 그 건물이 없어졌다는 게 지금 생각하니 참 아쉽다. 안타깝게도 영화 <사랑>의 필름마저 남아있지 않아서, 허봉조산부인과는 지금은 인천토박이들 중 60대 이상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인천사람에게 금기시되던 율목공원
허봉조산부인과는 참 멋지고 좋았지만, 거기서 100미터쯤 떨어진 율목공원(화장터)는 인천사람에게 금기시되는 장소였다. 왜 그랬을까? 여기는 일제강점기 정미업으로 이름을 날린 역무(리키다케) 별장이 있었다.
별장 주변은 한 때는 과수원이었고, 한 때는 일본인의 화장터로 유명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고, 이미 공원이 됐지만, 초등학생인 나는 한자로 쓰인 비석을 꽤 보았다. 이곳은 일찍부터 한적하면서도, 밤이면 으스스한 곳이었다.
"화장터 쪽에 가지 마라. 밤에는 안 돼. 여자가 가면 못 써."
이 얘기를 나는 집안이나 집밖에서 꽤 들었다. 어린 시절에, 화장터라고 해서 밤에 거기서 귀신이 나오는가 싶었다. 아니었다. 일찍부터 거기서 여러 사건 사고가 있었다. 1939년 4월 27일 밤 10시경, 바로 여기서 큰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신포동 어묵(가마보코)가게에서 일했던 두 점원이 갈등이 깊어졌고, 밤에 아무도 없는 리카다케 별장으로 끌고가서 눈에 고춧가루를 뿌리고 몹쓸 일을 자행했다.
해방이후 미군정 시기에는 더욱더 가서는 안 될 장소로 인식됐다. 1938년 3월 10일 <동아일보>의 한 기사는 "율목동 속칭 역무별장 일대에는 벌써부터 미군 상대의 사창소굴이라고 하리만큼" 이렇게 시작한다. 제목은 "인천 사창굴 적발, 4명을 여경서 문초"다.
인천 앞바다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은 어디일까? 누군 자유공원에서 보는 광경이라 하겠지만, 나는 '역무별장'(현 율목어린이도서관)과 해광사에서 바라보는 인천 앞바다다. 특히 노을이 질 때의 모습은 장관이다.
역무별장과 해광사(옛 화엄사)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미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했던 미군들이 바로 여기를 거처로 삼았다. 이런 여러 이유로 해서, 인천 원도심에 살던 어르신들은 '화장터' 주변을 매우 금기시했다.
해광사와 무용
이런 곳이 '율목공원'으로 만들어졌다지만, 인천시민들은 크게 반가워할 일이 없었다. 그런 곳에 '경아대'가 생겨지면서 이미지가 달라진 것이다. 1963년 3월 1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국악인들이 삼일절인 그날부터 경아대에서 살림살이를 시작했고, 이때부터 여기가 '인천국악원'의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