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청
이희훈
서울특별시장 선거는 대통령으로 가는 전초전이라고들 말한다. 의원내각제 하의 1960년 지방선거 때는 그것이 국무총리로 가는 전초전이라고들 말했다.
1960년 11월 27일 자 <동아일보> 기사 '서울시장선거'는 "서울특별시가 행정상 우리나라의 수도요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라는 이유뿐 아니라, 뉴욕시장이 대통령후보가 될 수 있는 정도로 정치적 비중이 큰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서울특별시장이 국무총리 후보의 비중을 가진다"고 말했다.
서울시장이 대통령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지만, 이제까지의 민선 서울시장 중에서 그렇게 된 인물은 2002년 시장에 당선된 이명박밖에 없었다. 총 9차례 선거에서 김상돈·조순·고건·이명박·오세훈·박원순 6명이 배출됐지만, 대권의 꿈을 이룬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서울시장 직이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데는 분명히 도움이 되지만, 대통령으로 가는 길을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언론이나 정치권은 '대선 전초전'을 운운하며 선거를 흥행시키려 했지만, 투표권을 가진 서울시민들은 대선보다는 다른 것을 좀 더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시민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서울시장 이미지는 대통령 이미지와는 분명히 거리가 있었다.
2010년 오세훈 재선, 2014년 박원순 재선 및 2018년 박원순 3선에서 나타나듯이 현역 시장이 패배한 적이 없다는 점 외에, 역대 선거에서 나타난 유형 중 하나는 현실 정치의 때가 덜 묻은 후보가 항상 당선됐다는 점이다.
자유당이 몰락한 뒤에 치러진 1960년 선거를 제외하면, 지방자치가 정착된 1995년 이후의 8차례 선거는 어떤 형태로든 여야 양대 정당이 참여하는 가운데 치러졌다.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2011년 보궐선거 때도 박원순을 당선시킨 표의 상당수는 제1야당인 민주당의 지지표였다. 이렇게 양대 정당이 각축하는 가운데서도 서울시민들은 정치적 때가 덜 묻은 후보에게 표를 던져왔다.
때
이명박도 지금과 달리 2002년에는 때가 덜 묻어 있었다. 이명박이 어떤 식으로 돈을 버는지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 당시, 유권자들에게 비쳐지는 그의 모습은 국회의원에 두 번 당선되고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때가 덜 묻은 인물이었다.
2007년 대선 전에 이명박 신드롬이 불어 그의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은, 이런 신드롬이 불 가능성이 있었을 정도로 대선 이전의 이명박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 이미지가 2002년에는 훨씬 강하게 남아 있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초의 민선 시장인 조순 역시 신선한 이미지의 덕을 봤다. 육사 교관 시절 노태우를 가르친 인연으로 노태우 정부의 경제기획원 장관 및 부총리를 역임한 적은 있지만 1995년 이전의 조순은 여의도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민주당 공천으로 시장에 도전한 조순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경제학자 이미지가 강했다. 그가 쓴 경제학 책도 오랫동안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1974년에 쓴 <경제학원론>은 제자인 정운찬 서울대 교수와의 공저로 변신하면서 1992년 8월 31일 현재 4판 6쇄까지 인쇄됐다.
제30대 선거가 있은 1995년 당시, 타이완(대만)에서 수입된 드라마 <판관 포청천>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주인공 포청천뿐 아니라 전조·공손책과 마한·장용·조호 같은 등장인물들도 인기를 얻은 이 드라마의 영향으로 조순은 '서울 포청천'이란 별명을 얻었다. 생김새나 눈썹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자들이 추천하는 그의 강직한 이미지 때문이기도 했다.
시장 선거 사흘 뒤 발행된 그해 6월 30일 자 <동아일보> '조순 씨, 고맙다 포청천'은 "서울시장 후보 조순 씨가 포청천이란 별명을 얻은 것은 94년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라며 "강의를 듣던 제자들이 강직한 면모나 생김새가 포청천과 꼭 닮았다며 붙여주었다"고 말한다.
김대중 지지자들이 민주당에서 새정치국민회의로 옮겨간 뒤에 이 당의 공천으로 제31대 시장이 된 고건 역시 전임자 조순처럼 정치적 때가 별로 묻지 않았다. 1975년에 전남지사가 되고 전두환 정권 때 교통부 장관 및 민주정의당(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내고 노태우 정권 때 관선 서울시장을 역임한 고건은, 유능한 행정 관료 이미지는 강해도 현실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