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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손님들 지갑 여는 할머니의 특급 장사 수완

잡곡에 갖가지 산나물까지... 양손 푸짐하게 맞이하는 정월대보름

등록 2021.02.26 07:48수정 2021.02.26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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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시장길 29-4에 위치한 '유구전통시장'은 1928년 개설된 상가건물형의 중형시장으로 매월 3일과 8일마다 정기장이 선다.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시장길 29-4에 위치한 '유구전통시장'은 1928년 개설된 상가건물형의 중형시장으로 매월 3일과 8일마다 정기장이 선다. ⓒ 박진희


23일, 매달 3일과 8일마다 열리는 공주 '유구 오일장'에 나가봤다. 정월대보름이 얼마 남지 않아 그날 먹을 오곡밥과 나물거리 몇 가지를 사러 나선 참이다. 그냥 나물이 아니라 시골 할매, 엄니들이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니며 뜯어다 말려놓은 나물을 목표로 벼르고 갔다.
 
 유독 한 할머님의 노점에만 손님들이 몰려 있었다.

유독 한 할머님의 노점에만 손님들이 몰려 있었다. ⓒ 박진희

 유구 오일장 노점에서는 쌀, 보리, 콩, 팥, 수수, 조, 기장 등을 섞어 불린 것을 사발 단위로 팔고 있었다.

유구 오일장 노점에서는 쌀, 보리, 콩, 팥, 수수, 조, 기장 등을 섞어 불린 것을 사발 단위로 팔고 있었다. ⓒ 박진희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서는 정기장이라 나물과 잡곡을 파는 노점이 눈에 띄게 많았다. 그중 유독 한 곳에만 손님들이 몰려 있으니 자연스레 그곳으로 발길이 이끌렸다.

오곡밥을 지을 쌀과 여러 잡곡을 섞어 팔고 있었다. 손님이 원하는 곡물만 사 갈 수도 있었는데, 스테인리스 대야가 바닥을 드러내면 금방 다시 채워지는 거로 봐서는 섞은 것을 한두 사발씩 사 가는 사람이 더 많은가 보다.


드문드문 강낭콩이나 서리태 대신 초록색 콩이 보여 뭔가 싶었는데, 냉동한 완두콩을 해동하면 모르는 사람 눈에는 알 작은 청포도처럼 보인단다. 냉동식품이긴 하지만, 세상에나! 이 계절에 완두콩을 다 먹는다.

할머니 장사 수완에 그냥 갈 수가 없네 
 
 유구 오일장 노점에서는 시래기, 취나물, 고사리, 무말랭이, 호박고지 등을 삶아 팔고 있었다.

유구 오일장 노점에서는 시래기, 취나물, 고사리, 무말랭이, 호박고지 등을 삶아 팔고 있었다. ⓒ 박진희

 노점상을 하는 할머님이 직접 따서 말린 다래잎을 팔고 있었다.

노점상을 하는 할머님이 직접 따서 말린 다래잎을 팔고 있었다. ⓒ 박진희

 
이 노점에만 유독 손님이 몰린 이유는 간단했다. 장사가 잘 돼 기분이 좋은 할머님이 호기롭게 내뱉은 몇 마디 말로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우리 집은 4000원에 판다고 벌써 소문이 다 났네벼. "

다른 노점상보다 나물 한 사발에 1000원이 더 싸다는 걸 지나가는 손님들 들으라고 호객하는 솜씨가 보통은 넘는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이유가 하나만은 아닌 듯했다.

장터를 누비고 다녀도 이 할머니 좌판만큼 나물이 다양한 곳도 없었다. 취나물, 고사리, 고구마 줄기, 토란대는 물론이고 뽕나무잎, 다래잎, 망초대 등등 골고루 갖춰 놓았다. 더 둘러보고 사려던 나 역시 할머님 장사 수완에 결국 나물 몇 가지를 사고 말았다.
 
 호박고지는 한 봉지 5,000원에 팔리고 있었다.

호박고지는 한 봉지 5,000원에 팔리고 있었다. ⓒ 박진희

 
부부 내외가 장을 보러 와서 호박고지 한 봉지를 사서는 검은색 봉투에 갈무리하며 묻는다.


"할머니, 어떻게 먹어요? 들기름에 볶으면 되지요?" 
"그라지. 물에 불렸다가 볶으면 보들보들하니 맛나."

시골 장터에서 팔리는 푸성귀는 할머님들이 일러주는 레시피대로만 하면 크게 실패할 리가 없다. 
 
 한 손님이 18,000원에 오곡과 복쌈용 나물 네 종류를 샀다며 들어 보인다.

한 손님이 18,000원에 오곡과 복쌈용 나물 네 종류를 샀다며 들어 보인다. ⓒ 박진희

 
할머님과 안면이 있는 중년 여성은 이것저것 해서 1만8000원 어치나 샀다. 단골이라고 덤 인심이 좋았다 쳐도 양이 솔찬히 많다. 여전히 옛사람들이 그랬듯 정월 14일 아침에 고기나 김치를 먹지 않고, 식구들과 둘러앉아 오곡밥과 나물 반찬으로 첫 끼를 들거나, 이웃들끼리 오곡밥과 나물을 나누는 '백집 밥먹기'를 이어가는 가정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열무김치는 없지만... 푸짐한 '엄마표 밥상' 
 
 종묘상에는 소독 처리를 한 종자들이 팔리고 있었다. 봄이 재배 적기인 열무씨도 팔리고 있었다.

종묘상에는 소독 처리를 한 종자들이 팔리고 있었다. 봄이 재배 적기인 열무씨도 팔리고 있었다. ⓒ 박진희

   
오곡밥은 김이나 배춧잎에 싸서 '복쌈'으로 먹기도 한다. 채소 좌판 근처를 지나는데 두 여인의 대화가 발목을 잡는다.

"요즘 열무가 어딨어?"
"지들 입맛대로 먹고 싶다고 하는 거지."


여기서 '지들'은 자식들인 것 같다. 열무야 7월~9월이 제철인데, 열무김치를 먹고 싶다고 했으니 철부지들 없는 데서 한 소리 해대는 중이었다. 

"배추나 사 가."
"배추는 생것이 맛있지?"
"쫑쫑 썰어서 청국장 끓여도 맛있지."


객지에서 일하는 아들, 딸들이 모처럼 집에 오는가 보다. 타지에서 고생하는 자식들에게 먹고 싶은 걸로 밥 한 끼 챙겨 주려 했나 본데, 하필 더워져야 먹을 수 있는 '열무김치'를 찾을 게 뭐람.

비록 먹고 싶다던 열무김치는 몇 달 뒤에나 먹게 되겠지만, 간이 센 외식이나 인스턴트식품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아들, 딸이 고향에 내려와 받는 '엄마표 밥상'의 진가를 모를 리 없다. 

아무리 계절감이 떨어지는 이라도 보름날 오곡밥과 나물 반찬 놓인 밥상을 받고, 지척에 당도해 있는 봄소식을 어찌 모르겠는가. 모처럼의 특식으로 영양 보충하고, 식구들과 2021년의 남은 열 달을 내달릴 채비를 단단히 해야겠다.
#작은 보름 #대보름 #세시풍속 #오곡밥과 복쌈 #부럼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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