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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서 영웅이 되는 '개고기'가 있다고?

이제는 희미해진 개고기의 다른 뜻

등록 2021.03.10 09:53수정 2021.03.1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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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란 무엇인가? 먹어도 되느냐 아니냐, 여전히 세상 논란 한 가운데에 있는 개고기도 있지만, 먹는 것과 전연 관련 없는 또 다른 개고기도 있다. 예전엔 일상어로 쓰였으나 이제는 거의 들을 수 없게 된 죽은말 개고기. 하지만 그 흔적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우선, 1938년에 발표된 '유행만요' <개고기 주사(主事)> 1절 가사를 보자. 누가 봐도 후줄근한 행색이지만, 한심하게 바라보는 다른 이들에게는 또 '버럭' 반응을 하는, 만만치 않은 인물의 모습이 현실감 있게 그려진다.


"다 떨어진 중절모자 빵꾸 난 당꼬바지/ 꽁초를 먹더라도 내 멋이야/ 댁더러 밥 달랬소 댁더러 옷 달랬소/ 쓰디쓴 막걸리나마 권하여 보았관데/ 이래봬도 종로에서는 개고기 주사 나 몰라 개고기 주사를" (노래 듣기)

노래 속 주인공 '개고기 주사'는 또 여름에 겨울옷을 입고 겨울엔 반대로 여름옷 입고, 삐딱하게 옆으로 걷기도 한다. 나름 멋이라고 안경은 팔에다 걸치고, 냉수를 마시면서 엉뚱하게 식초를 치며, 햇빛 쨍쨍한 날에 우산도 쓴다. 남들이야 어떻게 보든 말든, 나는 내 식대로 하겠다는 거친 개성이 선명하다.

개고기에 이런 뜻도 있다니 
 

<개고기 주사> 음반 딱지 ⓒ 네이버


일각에서는 이런 <개고기 주사> 가사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는 조선시대 고사와 굳이 연결시켜 보기도 하지만, 이는 아무런 근거 없이 그냥 갖다 붙인 해석일 뿐이다. '가장(家獐. 글자 그대로 풀자면 집노루)'이 개장(국)을 돌려 표현한 음차이므로 개고기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노래 속 개고기는 그런 개고기가 아니다.

노래 속 개고기의 의미는 사실 국어사전에도 이미 등재되어 있다. 개고기의 첫 번째 뜻은 말 그대로 개의 고기. '가장주서' 운운하는 오류가 생긴 이유는 개고기를 단순하게 이 첫 번째 뜻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성질이 고약하고 막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이것이 바로 <개고기 주사>에 나오는 개고기와 부합하는 뜻이다.

<개고기 주사> 음반이 발매될 당시 제작사인 콜럼비아레코드 서울 지점과 도쿄 본사를 오간 일본어 서류에서는 이 노래 제목을 <天下の與太者>로 표기해 놓았는데, 이 역시 일본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개고기의 뜻을 풀어 쓴 것이다. 일본어 '요타모노(與太者)'는 개고기의 두 번째 뜻과 통하는 게으름뱅이, 불량배, 바보, 못난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망나니와 개고기가 등장하는 <임꺽정> 대목 ⓒ 조선일보


대중가요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도 두 번째 개고기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예컨대 홍명희의 <임꺽정> 1933년 10월 연재분에는 '망나니라는 둥 개고기라는 둥 하는 조명은 내 귀로도 많이 들었네', '망나니니 개고기니 별명이 있는 자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망나니와 개고기가 비슷한 뜻으로 통용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민관식이 1957년 신문 인터뷰에서 중학교 때 형편없는 개고기였다고 술회하기도 하는 등, 적어도 1950년대까지 개고기는 두 번째 뜻으로도 충분히 많이 사용되는 일상적 말이었다. 다만 '개고기라는 서울 사투리'란 표현이 1930년대 소설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조선일보> 1939년 8월 10일자),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는 흔히 쓰이지 않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
 

'개고기가 자라면 영웅' ⓒ 매일신보


<개고기 주사>에서 묘사된 모습이 '일반적' 관점에서는 이상하게, 불편하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한결같은 그 고집을 바라보는 작자의 시선이 사실 그렇게 차갑지만은 또 않다. 이와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기록이 보이는데, <매일신보> 1936년 9월 15일자에는 아이들 고집이 센 것은 좋은 성미이므로 함부로 꾸짖지 말라는 조언과 함께 '개고기가 자라면 영웅'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개고기가 꼭 부정적으로만 쓰이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예이다.

세월 속에 흐릿해진 속어 개고기를 오늘날 되살려 쓸 필요는 물론 전혀 없다. 일부 긍정의 뉘앙스가 있지만 대체로 부정적인 표현인 것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쓰이던 개고기의 또 다른 뜻을 제대로 알아 둘 필요는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앞서 본 바와 같이 견강부회하는 또 다른 개고기가 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고기 #개고기 주사 #가장주서 #망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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