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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고와 서울고 출신 노벨상 수상자 내기한 교장들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학교도서관 선구자 김원규 ②

등록 2021.03.19 18:56수정 2021.03.19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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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양성에 헌신했던 김원규는 '도서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58년 10월 18일 경기고등학교는 316석의 열람실을 갖춘 도서관을 개관했다. 당시 국내 학교도서관 중 '으뜸'이었던 이곳은 제물포고등학교를 비롯해 수도권 학교도서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원규는 왜 '책읽기'와 '도서관'에 주목했을까? 함흥농업학교 시절부터 김원규는 책읽기를 강조했다. 그는 '책을 많이 읽되 자기가 좋아하는 책이라면 무엇이든 읽으면 도움이 된다'라는 독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함흥농업학교 시절 이런 생각을 학생들에게 얘기했다가 일본인 교장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원규는 독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학교도서관의 중요성을 강조한 해룡
 
서울교육박물관 1995년 서울시는 중부교육청 중부교육박물관, 정독도서관, 덕수초등학교 덕수기념관에 나뉘어 있던 교육 사료를 정독도서관으로 합쳤다. 정독도서관 부설 ‘서울교육사료관’은 이렇게 탄생했다. 서울교육사료관은 2011년 2월 28일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서울교육박물관 건물이 경기고 시절 도서관으로 쓰인 곳이다. 김원규 교장과 김경일 사서교사 시절 경기고 도서관에서는 단 한 권의 책도 분실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건물 남동쪽에 김원규 교장이 거주한 교장 관사가 있었다.
서울교육박물관1995년 서울시는 중부교육청 중부교육박물관, 정독도서관, 덕수초등학교 덕수기념관에 나뉘어 있던 교육 사료를 정독도서관으로 합쳤다. 정독도서관 부설 ‘서울교육사료관’은 이렇게 탄생했다. 서울교육사료관은 2011년 2월 28일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서울교육박물관 건물이 경기고 시절 도서관으로 쓰인 곳이다. 김원규 교장과 김경일 사서교사 시절 경기고 도서관에서는 단 한 권의 책도 분실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건물 남동쪽에 김원규 교장이 거주한 교장 관사가 있었다.백창민
 
삶에서 책읽기와 도서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던 김원규는 나이 들어서도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다.

1960년대 초반까지 학교도서관 분야에서 큰 위상을 지녔던 경기고등학교 도서관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 학교도서관이 1960년대 전성기를 맞고 쇠퇴한 것처럼, 경기고 도서관의 위상도 약해지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는 김원규 교장과 김경일 사서교사가 모두 경기고를 떠났기 때문이다.

도서관 운영에 있어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원규 교장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5일 경기고를 떠나 삼성중고등학교와 북인천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한때 선구적인 학교도서관이 있던 화동 경기고등학교 교정은 이제 서울 최대의 도서관(정독도서관)으로 재탄생했다. 경기고가 정독도서관으로 바뀌면서 김원규 교장이 살았던 교장 관사는 사라졌다.


김원규와 길영희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시절 김원규와 길영희 두 사람 모두 한국 도서관과 중등교육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서로 다른 교육철학을 펼친 두 사람 덕분에 1960년대 한국 학교도서관은 전성기를 맞았다. 해방 이후 한국 도서관 선구자 중에 히로시마고등사범 출신이 여럿 있다. 사진 아랫줄에 김원규와 길영희가 있다.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시절 김원규와 길영희두 사람 모두 한국 도서관과 중등교육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서로 다른 교육철학을 펼친 두 사람 덕분에 1960년대 한국 학교도서관은 전성기를 맞았다. 해방 이후 한국 도서관 선구자 중에 히로시마고등사범 출신이 여럿 있다. 사진 아랫줄에 김원규와 길영희가 있다. <다시 태어나도 교육자의 길을>에서 재촬영
 
이 대목에서 김원규와 길영희 교장 이야기를 해보자.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시선을 끈다. '규율'을 강조한 김원규 교장에 비해 길영희 교장은 '자율'을 강조했다. 서로 다른 교육철학을 가졌음에도 서울고와 제물포고를 '명문'으로 키웠다. '독서실'이 아닌 제대로 된 '도서관'의 역할을 강조한 점도 같다. 한국 도서관과 중등교육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교육에 대한 철학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서로 인정하는 사이였다. 1961년 10월 3일 김원규는 제물포고 길영희 교장의 정년퇴임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원규는 내빈사를 하다가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 길영희 교장이 김원규 교장에게 "당신 제자하고 내 제자 가운데 누가 먼저 노벨상을 차지하나 두고 보자"라는 제의를 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제물포고와 서울고 출신 중에 아직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진 않았으나 흥미로운 '대결'이 아닐 수 없다.


서울고등학교와 경기고등학교 교장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김원규 교장은 1964년 2월 4일 서울시 교육감이 되었다. 큰 기대를 모았지만, 김원규 교육감은 이른바 '무즙 파동'으로 알려진 중학교 입시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65년 7월 5일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엿 먹으라'는 말이 탄생한 무즙 파동
 
서울교육대학  1946년 옛 경기고등학교 안에 경기공립사범학교가 문을 열었다. 1962년 경기공립사범학교는 서울대학교 부속 교육대학(2년제)이 되었다. 1981년에는 4년제 교육대학으로 바뀌었다. 김원규는 1957년 10월 25일부터 1958년 4월 21일까지 서울사범학교 5대 교장으로 일했다. 서울사범학교는 지금의 ‘서울교육대학’(서울교대)이다.
서울교육대학 1946년 옛 경기고등학교 안에 경기공립사범학교가 문을 열었다. 1962년 경기공립사범학교는 서울대학교 부속 교육대학(2년제)이 되었다. 1981년에는 4년제 교육대학으로 바뀌었다. 김원규는 1957년 10월 25일부터 1958년 4월 21일까지 서울사범학교 5대 교장으로 일했다. 서울사범학교는 지금의 ‘서울교육대학’(서울교대)이다.백창민
 
1964년 12월 서울지역 중학교 입시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이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자연 과목 18번 문제다. 정답은 '디아스타제'로 발표되었다. 그러자 학생과 학부모가 반발했다. 또 다른 보기 항목인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부모는 '무즙'으로 직접 엿을 만들어 서울시교육위원회를 찾아가 항의했다. 항의 과정에서 나온 '엿 먹으라'는 말은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 때문에 명문중학교에 떨어진 학생과 학부모는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고등법원은 '디아스타제'와 '무즙'을 모두 정답으로 인정했다. 이 문제로 탈락한 학생들은 경기중 같은 명문중학교에 재입학할 수 있었다. 이른바 명문중학교 진학을 위해 초등학생조차 '입시'를 치러야 했던 시절의 풍경이다.

서울시 교육감에서 물러난 후 김원규는 1966년 5월 3일부터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지금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정년을 1년 앞둔 그는 실습 교육을 위해 일본 출장을 떠났다. 일본 출장 중이었던 1968년 12월 10일, 김원규는 심장근육 장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4세였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김원규는 부산고 김하득 교장, 익산 남성고 윤제술 교장, 제물포고 길영희 교장처럼 '서울고의 전설'이 되었다. 일본에서 그의 죽음을 지킨 한국문제연구소장 최서면은 이런 애도시를 남겼다.

"그대 이 세상에 태어나던 날 기뻐하지 않은 사람 없었고 홀로 그대만 울더니, 그대 홀로 떠나간 오늘날 울지 않는 사람 없고, 홀로 그대만 울지 않는 사람 되었네."

영원히 서울고에 머물게 된 김원규
 
김원규 교장 흉상 2001년 서울고등학교 총동창회는 서초동 교정에 김원규 교장의 흉상을 세우고 제막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유가족과 많은 제자가 참석했다. 서울고 동문이 얼마나 김원규 교장을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 서울고등학교에는 교가를 3절까지 부르는 전통이 있다. 재학생보다 졸업한 동문이 더 열심히 부른다는 얘기가 있다. 그들이 애창하는 교가를 작사한 사람도 김원규 교장이다.
김원규 교장 흉상2001년 서울고등학교 총동창회는 서초동 교정에 김원규 교장의 흉상을 세우고 제막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유가족과 많은 제자가 참석했다. 서울고 동문이 얼마나 김원규 교장을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 서울고등학교에는 교가를 3절까지 부르는 전통이 있다. 재학생보다 졸업한 동문이 더 열심히 부른다는 얘기가 있다. 그들이 애창하는 교가를 작사한 사람도 김원규 교장이다.백창민
 
도심 명문학교의 강남 이전 정책에 따라 1980년 6월 9일 서울고등학교는 서초동으로 이전했다. 한국 중등교육과 학교도서관 분야에서 큰 역할을 한 김원규 교장의 흉상은 서초동 서울고등학교 교정에 서 있다. 사립학교도 아닌 공립학교 교정에, 설립자가 아닌 교장으로 일한 사람의 흉상을 세우는 건 흔치 않다.

서울고등학교 총동문회는 만장일치로 김원규 교장의 흉상 건립을 찬성하고, 2001년 5월 14일 그의 흉상을 세웠다. 명문 서울고등학교의 탄생에 김원규 교장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재직 시절 "서울고 교정에 뼈를 묻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던 그는 이제 '흉상'으로 서울고 교정에 영원히 머물게 되었다.

해방 후 출범한 '조선도서관협회'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이재욱과 박봉석 같은 핵심 인물이 납북되면서 와해되었다. 1955년 4월 16일 '한국도서관협회'는 재건되었다. 1956년 4월 20일 열린 한국도서관협회 총회에서 김원규 교장은 '학교도서관부회' 회장을 맡았다.

당시 '공공도서관부회' 회장은 국립도서관장 조근영, '대학도서관부회' 회장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 정광현, '특수도서관부회' 회장은 국회도서관장 김경수였다. 한국 도서관계에서 김원규 교장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김원규 교장은 한국도서관협회 이사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57년부터 한국도서관협회 이사로 활동한 그는 1960년에는 상무이사로 일했다.

1957년 11월 김원규 교장은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인도.태평양지구 국제 출판물 교환에 관한 연구회 및 아시아도서관협회 연맹 창립총회'에 한국 도서관 대표로 참석했다. 이봉순 교수와 함께였다.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영문과 출신으로 일본어와 영어에 능하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도쿄 총회에 다녀온 김원규는 한국 도서관 현실을 비판하는 글을 <한국일보>에 기고하기도 했다.
 
"각국의 국립도서관장들은 그 나라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지위로는 그 나라의 장관급이었다. 우리나라의 사정과는 너무나 판이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립도서관이나 시립도서관은 문교부나 시에서 좌천하는 직원들을 처치하는 곳으로 알고 있다. (중략) 서울시립도서관인 남대문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이나 종로도서관을 외국 사람들이 보고 어떻게 우리나라를 평가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다."

그가 교육감으로 오래 일했다면
 
사서교사 김경일 김경일은 진해 해군사관학교 도서관 열람과장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한국도서관협회 간사로 일하던 김경일은 김원규 교장의 권유로 경기고등학교에서 사서교사로 일했다. 현대식으로 개관한 경기고등학교 도서관은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 건립에 영향을 미쳤고, 나아가 수도권 학교도서관 확산에 기여했다. 김경일은 제6대(1988년~1993년) 한국도서관협회 사무국장으로도 일했다.
사서교사 김경일김경일은 진해 해군사관학교 도서관 열람과장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한국도서관협회 간사로 일하던 김경일은 김원규 교장의 권유로 경기고등학교에서 사서교사로 일했다. 현대식으로 개관한 경기고등학교 도서관은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 건립에 영향을 미쳤고, 나아가 수도권 학교도서관 확산에 기여했다. 김경일은 제6대(1988년~1993년) 한국도서관협회 사무국장으로도 일했다.<한국도서관협회 60년사>에서 재촬영
 
도서관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김원규가 서울시 교육감으로 오래 일했다면, 수도 서울의 학교도서관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실제로 김원규 교육감은 경기고에서 그와 함께 학교도서관을 일군 사서교사 김경일을 담당 장학사로 데려와 일하려 했다.

실현되었다면 경남 학교도서관 운동을 이끌었던 이윤근 교육감과 김두홍 장학사 쌍끌이 체제처럼, 서울지역 학교도서관 운동도 일대 전환점을 맞지 않았을까? 학교도서관 분야에 큰 발자취를 남긴 두 사람이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김원규 교장과 함께 도서관 현장을 열정적으로 누빈 김경일은 '문헌정보학계'에 대해 뼈아픈 지적을 남긴 바 있다.
 
"문헌정보학계도 문제가 많아요. (중략) 연구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현실과 무관하게 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현실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무관심하고, 한마디로 무풍지대에요. 그러니까 안일하다는 거죠. 자기가 하는 학문에 대해서 집념을 가지고 새로운 학문 개발을 시도하고 노력해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이 학자의 기쁨이고 본질이잖아요. 이거 태만하면 학자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은 전부 외국 것, 미국 것 가져다가 그대로 강의하고, 논문 쓰고 하니까 맞을 리가 없지요. 각성해야 합니다. 그 이론을 가지고 우리나라 풍토에서 적용하고 우리나라에 맞는 것을 찾아 나가야지, 우리 것 무시하고 전부 외국 것만 찾아서 갖다 붙이면 끝이에요. 대학에서 반성해야 합니다. 학교도서관, 사서교사 안 팔리니까 학교도서관 강의 안 합니다. 그럼 안되죠. 그럴수록 더 해야 하는 거예요. 대학에서 해야 할 것을 안 하고 오히려 죽이는 격이에요. 이건 완전히 대학이 장사하는 겁니다." - <한국 학교도서관 운동사>(김종성 지음, 한국도서관협회) 내용 중 일부

김원규, 길영희, 추월영, 박경원, 이윤근, 조재후, 김경일, 최근만, 김두홍, 김세익, 박태신, 정해숙, 권양원... 수많은 이가 '수처위주'(隨處爲主)의 삶을 살았기에 1960년대 한국 학교도서관은 중흥을 맞았다. 한때 한국 학교도서관 분야는 미국과 일본에도 꿀릴 것 없다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학교도서관 선구자인 김두홍, 최근만, 김경일은 한국도서관협회 기획부장과 총무부장, 사무국장으로 활약하며 한국 도서관계를 이끌었다. 한편 열정적인 교장과 사서교사가 대학을 비롯한 다른 공간으로 떠나면서 학교도서관 운동도 쇠퇴를 맞았다.

어디서나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
 
김원규 교장 묘소  모란공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에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사설 공동묘지다. ‘마석 모란공원’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월산리에 있다. 모란공원에는 민주열사 묘역이 있다. 김근태, 노회찬, 문익환, 박종철, 백기완, 이범영, 이재문, 전태일, 조영래가 이곳에 묻혔다. ‘도서관 건축가’ 정기용도 모란공원에 묻혀 있다. 김원규 교장은 1991년 아내 양부미가 세상을 떠난 후 모란공원으로 이장해서 함께 묻혔다. 묘소번호는 모란B 126이다.
김원규 교장 묘소 모란공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에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사설 공동묘지다. ‘마석 모란공원’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월산리에 있다. 모란공원에는 민주열사 묘역이 있다. 김근태, 노회찬, 문익환, 박종철, 백기완, 이범영, 이재문, 전태일, 조영래가 이곳에 묻혔다. ‘도서관 건축가’ 정기용도 모란공원에 묻혀 있다. 김원규 교장은 1991년 아내 양부미가 세상을 떠난 후 모란공원으로 이장해서 함께 묻혔다. 묘소번호는 모란B 126이다.백창민
 
2020년대로 접어든 학교도서관의 오늘은 어떨까? 현장이 아직 열악하다면, 우리 학교도서관은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을 여전히 필요로 하는 상황일 것이다. 선구적 교육자와 헌신적인 사서교사 말이다. 결국 '사람'이 문제이며 '사람'이 모든 일의 시작이자 끝이다.

'어디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을 강조한 김원규는 이 나라 중등교육과 도서관 분야에서 '꼭 있어야 할 사람'으로 발자취를 남겼다. 다시 김원규 교장이 강조했다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을 떠올린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꼭 있어야 할 사람이다."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
#김원규 #서울고 #경기고 #학교도서관 #인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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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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