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태, 파리강화회의에 가다 (1)

[부산경찰서 투탄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25-1

등록 2021.03.15 16:44수정 2021.03.1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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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차대전과 민족자결주의

20대 청년 시절은 꿈을 키우는 시절이다. 박재혁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 나라를 갔지만 쉽게 이룰 수 없었다. 조선과 중국을 오가는 동안 식민지 조선과 반식민지 중국의 상황을 바라보며 망국의 비애를 충분히 느끼며 독립운동에 대한 염원도 가슴 한 곳에 간직하였다.

정공단의 친구들은 국내에서는 일본 식민 통치의 폭압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국외에 머물렀던 박재혁은 필리핀과 싱가포르에서 무역 활동을 하였고, 김인태는 프랑스 조계에 머물며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세계정세도 급변했다. 의병운동도 일제의 탄압에 막을 내리고 국내에서는 독립을 포기하고 진화론적 입장에서 일본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한광복회나 대한독립의군부는 군사적 방법을 통한 독립을 추구하였다. 유럽에서의 제국주의 전쟁은 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대전이 되어, 서구 열강 사이의 제국주의 패권 다툼에서 상대적으로 중시되지 않던 동아시아를 세계국제정치의 맥락에서 재편성하였다.

일제는 대륙 국가화의 거점으로 1910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후, 1914년 세계대전을 기회로 중국 대륙을 향한 북진 대륙진출을 꾀하였다. 이노우에(井上馨)의 말처럼 제1차 대전을 "다이쇼(大正) 신시대의 천우(天佑)"로 여겼다. 만주와 몽고지역은 일본이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열세를 극복하고 열강의 반열에 이르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자원과 토지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이 '주권선'이었고 조선은 '이익선'이라면 만몽지역은 국방 안보 차원의 '생명선'이었다.

하지만 조선과 달리 중국은 열강들의 이권이 복잡하게 얽힌 지역이라 쉽지 않았다. 1916년 10월 14일, 하세가와는 일본 수상이 된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후임으로 2대 조선 총독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정책은 데라우치를 그대로 답습한 무단통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재편성 전쟁이었고 독점자본주의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나라는 미국과 일본이었다. 전쟁은 군수산업의 호황을 가져왔고 그것은 미국과 일본은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나는 사이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레닌이 중심이 된 볼셰비키에 의해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무산계급에 의한 혁명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러시아는 제국주의 전쟁을 부정하였고, 세계혁명을 목표로 하였다. 레닌은 '평화에 관한 포고'에서 모든 국민 및 민족집단의 자결권을 천명하여 모든 피억압 약소 민족의 독립 욕구를 자극하였다.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공산주의는 세계사조의 하나로 지식인과 피억압 대중에게 광범하게 전파되었고, 약소 민족에게는 민족해방의 복음이 되었다. 세계는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국가로 양분되게 되었다. 또한 제국주의 모순을 강조해 전 세계 노동자의 투쟁을 고무시켰다. 러시아혁명은 기존의 지배체제와 국제질서가 전복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유주의 연합국은 독점자본주의적 이권을 수호하려고 하였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918년 1월 8일 의회에서 전쟁 종식과 민주주의 영구평화계획을 담아 '14개조 선언'을 제창하였다. "모든 영토와 주권은 각 민족에게 귀속되어야 하고 영토문제의 해결은 타협이 아니라 관계 국민의 이해와 복지,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라는 민족자결의 원칙을 선언하였다.

볼셰비키 정권에 대응한 윌슨의 민족자결 선언은 식민지 조선을 비롯한 약소 식민지 민족(국가)에게 독립의 서광을 비추는 복음으로 들렸다. 식민지 민족자결의 문제는 전승국과 직접 관련된 곳에 국한되었지만, 당시 식민지 약소 민족은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대동단결 선언문 대동단결의 선언문-등록문화재 제652호 「대동단결선언문서」는 신규식, 박용만, 조소앙 등 해외 독립운동가 14명이 통합적인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려는 뜻을 가지고 민족대회를 소집하기 위해 1917년 7월 국내외 민족 운동가들에게 작성한 한글과 한문으로 된 문서이다. ⓒ 독립기념관 소장자료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전쟁의 종전에 대비해서 일찍이 대표단을 파견할 구상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에 있었다. 이 선언은 신규식, 조소앙 등이 내외 상황의 변화를 포착하여 새로운 독립운동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민족대회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려고 계획한 제의(提議) 제창(提唱)의 문서였다.

신한혁명당은 1915년 광무황제를 중국으로 데려가 왕정을 복구하려는 복벽주의(復辟主義)를 표방했지만 실패하였다. 사회주의 혁명과 제국주의 전쟁의 결과, 점증하는 민중의 요구로 독립운동가 사이에 공화주의는 대세가 되었다.

김인태, 국내의 독립 시위를 촉구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이를 대비한 독립운동은 크게 4곳에서 추진되었다.

첫 번째는 미주 대한인국민회에서 이승만과 정한경의 파견을 추진하였고 두 번째는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의 파견을 추진하였다. 세 번째는 국내 유림계 137명이 '파리장서'를 작성, 서명하여 김창숙을 대표로 하였고, 마지막으로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에서 윤해와 고창일을 파견대표로 추진하였다.

이 가운데 파리에 파견되어 선전 외교활동을 전개한 것은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한 신한청년당뿐이었다. 미주 대한인국민회는 미국이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여권을 발급하지 않아 결국 이승만은 미국 언론에 위임통치 청원 문서를 보냈다. 국민회의의 윤해와 고창일은 파리강화회의가 종결된 1919년 9월에 파리에 도착하였고, 대한인국민회와 유림 대표는 파리에 파견되지 못하고 상해 임정 재무차장 윤현진이 번역한 '파리장서'를 김규식에게 보냈다.

1918년 8월 중국 상해에서 박은식, 신채호, 홍명희, 김규식 등이 이끄는 동제사(同濟社)를 주축으로 신한청년당이 결성되었다. 당의 강령은 대한독립·사회개량·세계대동 세 가지였다. 여운형이 1918년 12월 독립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고, 3월에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기로 했다.

서구열강에게 식민지 조선의 가혹한 현실과 일본 무단통치의 부당함을 알려 민족독립의 계기를 외부로부터 마련한다는 계획이었다. 파리로 가기 전에 김규식은 동지들에게 국내에서 독립선언 운동을 하라고 하였다. "내가 떠나가긴 가되 세계 각국 대표들이 내가 누군지 알 리는 없다. 지도상에 보더라도 조선 반도는 쌀알만큼 밖에 나타나 있지 않고 '코리아'라는 나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나 혼자만의 말만 가지고는 세계의 신용을 얻기 힘들다. 신한청년당에서 사람을 서울에 보내어 독립을 선언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신한청년당은 일본·만주·노령·서울 등 국내외로 동지를 파견하여 파리강화에 대표를 파견하였음을 알리고, 독립 운동자금을 모금하고, 나아가 국내외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킬 것을 주장하였다. 1918년 12월에 부산에 파견된 장덕수는 백산상회로부터 파리강화회의 참석 경비 3000원을 모금하였다.

1919년 1월 이후 서울과 대구, 호남 지방 등에 동지를 파견하였다. 일본 도쿄에 파견된 이광수와 장덕수는 일본 동경 유학생들과 접촉하였다. 그 결과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 한복판 YMCA 강당에 4백여 명의 유학생들이 "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이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의 앞에 독립됨을 선언하노라"며 조선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우리 겨레의 독립에 불응할 경우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였다. 양산 상북면 상삼마을의 출신 김철수는 유학생 대표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일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양산청년회를 결성하고 사회운동을 하였고, 해방 후 경남도지사가 되었다.

1919년 2월 초순 뜻하지 않게 김인태가 상해에서 잠입하여 오재영(오택)을 찾아왔다. 오택은 같이 지내면서 밤새도록 세계 대세로부터 조선 독립까지 일관된 설명을 들었다. 김인태는 세계 전쟁의 종전으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식민지 국가의 독립이 논의될 것이면 지금이야말로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대한독립을 선언하는 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오택은 김인태의 말에 공감하고, 국내의 독립선언운동에 동참하겠다고 하였다. 당시 김인태는 겨우 서울 갈 여비뿐 가난하여 여력이 없어 자금은 오택이 구해야 했다. 구세단 활동을 하다 갇힌 김인태를 석방하기 위해 김인태의 부모는 양산에 있던 전답을 팔았기에 집안 사정이 좋지 못했다.

김인태를 상경시키고 오택은 2월 20일경 겨우 5000원을 빚내었다. 그 속에는 부인의 금은주옥 반지 패물을 판 대금도 있었다. 오택이 20일 후 상경하니 김인태는 사태가 위급하여 국내 요인을 신속 방문하고, 안동을 경유 상해로 갔다. 오택에게는 뒤에 오라는 편지를 남겼다. 오택은 전문학교 재경 학우를 방문하여 거사의 대요를 듣고 연락 부문을 맡아 활동하였다. 당시 오택이 만난 친구는 명진학교 동창생으로 경성의전에 다닌 김형기로 추측된다. 오택은 서울에 남아서 3‧1독립만세운동에 모종의 역할을 하였다.

2월 중순 최천택(24세)은 일본 모지(門司, 북규슈)에서 중국 상해에서 건너온 김인태를 상봉하고, 3월 1일에 전국적으로 거행될 독립운동 전개에 대한 말을 들었다. 김인태가오택과 최천택에게 국내거사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 일은 당시 신한청년당의 활동과 같았다. 김인태가 신한청년당에 소속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의 일련의 행동은 신한청년당이 국내외에 벌린 독립운동과 같은 것이었다.

김인태, 김원봉을 만나 암살 밀명을 받고 파리로 가다

외교적 방법으로 강대국에 호소하는 형식의 독립 청원 운동에 비판적인 입장이 독립운동가 사이에 있었다. 미주의 한인들이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이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윤치호는 그의 1918년 12월 19일 일기에서 "바보들 같으니. 영국이 인도를, 미국이 하와이를, 프랑스가 안남(베트남)을 포기할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말하지 말라. 일본에게 조선을 포기하라고 뻔뻔하게 말할 수 있는 강대국이 있을까? 뿐만 아니라 한 나라가 선물로서 받는 독립은 지속되지 않는다. 미국에 있는 몇몇 인사들이 하와이에 있는 가난한 (조선)노동자들이 내는 비용으로 워싱턴이나 파리를 방문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힐난하였다.

윤치호는 또 1919년 1월 28일 일기에서 "조선은 일본의 생명선이며, 군사적 힘으로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는 한, 후자(일본)는 전자(조선)를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과 함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 혹은 영국이 불쌍하고 작은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서 일본과 전쟁을 하려고 하겠는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인종 혹은 국가가 정치적 독립을 위해 싸우지 않고 (정치적 독립을) 쟁취한 예는 역사에 없다. 조선인이 싸울 수 없는 한, 독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라고 생각했다.

윤치호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진화론적 입장이었다. 그는 힘있는 강자의 논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실제 1919년 6월 28일 파리강화회의가 끝났을 때 현실주의자 윤치호의 지적은 일면 타당한 것이었다.

밀양 출신의 김원봉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원봉은 나라의 자주독립은 군대를 통한 독립이라고 생각했다. 군대양성을 위한 군사학을 알기 위해 1916년 10월 중국 천진의 덕화학당에 입학하였다. 1917년 여름 방학 때 귀국 중에 광복회 회원인 손일민과 김좌진을 만났다. 중국이 연합국에 가담하여 독일에 선전포고하여 덕화학당이 폐쇄되었다. 그는 김약수, 이여성과 친교를 맺고 해외에서 대사를 도모하자는 언약을 하고, 1918년 9월 세 사람은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다.

1918년 11월 세계대전이 종전된 이후 김원봉은 세 가지 일을 하기로 한다. 첫째 서간도에서 군대 양성하는 일, 둘째 상해에서 잡지 <적기>를 발간하는 일, 셋째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일이었다.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한다는 소식을 들은 김원봉은 그들과 다른 생각을 했다. "국가존망과 민족 사활 같은 큰 문제를 외국인에게 호소하여 오직 그들의 처분으로 결정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할 일도 아니거니와 하여서도 될 일도 아니다. 더구나 지금 파리회의에 모이는 무리들은 모두 다 자본주의 사회와 제국주의 국가를 대표하여 나선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승국의 권위와 오만을 가지고 회의에 나와, 배상금을 결정하고 분할하려는 일이다. 일본이 혹 전패국이기라도 한다면 또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당한 연합국의 일원이다. 열국이 대체 무엇 때문에 저희 우호국과 원수를 맺어서까지 약소 민족을 위하여 싸워 줄 것이나? 그것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원봉은 파리에 외교사절이 아닌 자객을 파견하려 하였다. 열국의 대표사절들이 구름같이 몰려든 프랑스 수도 파리에 가서 일본 대표를 암살함으로써 조선 민족의 혁명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그는 무전여행 때 만났던 부산의 김철성이 떠 올랐다. 김철성은 바로 김인태였다.

김인태는 구세단 사건 이후 중국 동제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머무는 중이었다. 그는 중국명 김일(金一)로 중국 여권을 가지고 있기에 프랑스에 가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김원봉은 김인태에게 천신만고하여 권총을 구하고 자기 계획을 말했다. 김인태는 김원봉보다 두 살 위였다.

"김형! 파리에서 세계대전 종전 회담을 합니다. 신한청년당에서 독립청원 외교를 벌이려고 김규식 선생을 파견합니다. 하지만 외교로 독립을 청원한다고 독립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을 청원하여 독립한다면 세계에 식민지가 있을리 없겠지요. 이번 기회에 일본의 실상을 낱낱이 알리는 거사를 김형이 했으면 합니다. 일본대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을 처단했으면 합니다."

김원봉으로부터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처단을 제의받은 김인태는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다. 김인태는 신한청년당의 일원으로 국내 독립운동에 대한 역할을 수행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독립이 단지 독립청원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김인태는 김원봉의 제안을 받아들여 프랑스로 향했다. 1919년 5월 프랑스에 도착했다.

당시 외교독립론을 주장한 사람이 있었지만 무장시위나 국내 진공을 준비한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단군을 신봉한 대종교가 대표적이었다. 대종교인들은 중국 길림에서 독립선언과 청원보다 구체적으로 항일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일본을 동양의 적, 국제법규의 악마, 인류의 적으로 규정하고, 독립운동가와 독립단체에게 대일전쟁을 수행할 것을 촉구하며, 국제사회에 호소하지 않고 주권국의 당위성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은 강대국의 선물이 아니라 쟁취해야 할 것임을 주장하였다.

파리에 파견한 대한의 사람들

김규식은 1918년 11월 강화가 성립되었을 때, 파리로 가기로 결정했으며, 평화회의에서 세계 앞에서 한국의 실정을 최소한 호소하거나 폭로하기로 했다. 천진에서 출발해 남경으로 가서 1919년 1월 19일 김순애와 결혼한 후 즉시 상해로 가서 파리행 여행을 준비했다. 김규식은 치밀한 세부 활동계획과 목표를 중국에서 확정한 후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파리로 출발하였다.

단지 김규식이 '영어를 잘하는 이유로' 신한청년당 대표로 선출되어 수동적으로 파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량과 활동 범위를 판단하고 계획한 후 파리로 출발하였다. 그는 출발 전 세계의 후원·동정을 획득하고, 공보국을 설치해 홍보활동을 벌이며, 강화회의에 비망록을 제출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그는 일본통치의 폭압성·부당성과 강제병합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한국인의 자치능력을 홍보하고자 했다.

김규식은 한국대표로 강화회의에 출석해 독립을 호소할 기회를 노렸으나, 이를 통해 독립을 얻을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그의 외교는 후원·동정, 홍보, 청원에 중점이 두어졌다. 2월 1일 프랑스 우편선 포르토스(Porthos)를 타고 파리를 향해 상해를 떠났으며 3월 13일에 도착했다. 43일 만이었다. 한국에서 3·1운동이 실행되고 있었음에도, 전쟁 직후 통신 및 연락 두절로 인해 그동안 4월 2일까지 파리에 어떤 뉴스도 알려지지 않았다.

1919년 4월 13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은 김규식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과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 위원 겸 주(駐) 파리한국통신국 대표위원으로 임명하고 신임장을 파리로 발송하였다. 이때부터 김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식 외교대표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김규식은 파리 시내 '샤토당'가 38호에 '강화회의 한국민대표부'을 설치하고 이후 대한민국 주파리위원부통신국(Bureau de Information Coréenne, '파리한국통신부', '파리위원부', '파리통신부' '파리주재 한국위원부' 등으로 불리움)을 설립했다.
 

파리평화회의(파리강화회의) 임시정부 대표단 앞줄 여운홍·○·○·김규식, 뒷줄 ○·이관용·조소앙·○·○·○·○·황기환. 「통신전」 발간활동을 한 김인태의 얼굴이 없는 까닭은 그가 공식적인 단체의 대표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

 
김규식은 통신국의 사무를 위해 스위스 취리히대학에 졸업시험을 준비 중이던 이관용(李灌鎔)을 파리로 불렀다. 미국 군인으로 유럽 전선에 참가했다가 독일에 와 있던 황기환(黃玘煥)은 김규식의 부름을 받자 제대한 후 6월 3일 통신국에 합류했다. 이와 함께 김인태(김탕, 1896~?)이 5월 초순, 이관용(李灌鎔, 1894~1933)이 5월 18일, 여운홍(呂運弘, 1891~1973)이 6월 3일, 황기환(黃玘煥, Earl K. Whang, 1886~1923)이 6월 3일,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이 6월 말에 도착하였다.

여운홍은 당시 짐을 챙길 때 국내에서 몰래 입수한 일제 만행 사진 40여 장을 허리에 감추어 갔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속속 파리에 도착하면서 파리 한국통신국은 활기를 보였다. 이와 함께 김규식의 비서로 마담 마티앙, 그리고 2명의 타이피리스트와 2명의 프랑스 남자 사무원을 고용하여 총 11명으로 한국대표단의 진용을 갖추었다. 파리한국통신국의 초기 조직은 위원장 김규식을 비롯하여 부위원장 이관용, 서기장 황기환으로 구성하였다. 김규식은 5월에 도착한 김탕으로부터 실질적인 한국의 3.1만세운동 소식을 직접 들었을 것이다.

원래 김인태는 파리에 공식적으로 파견한 인물이 아니었다. 갑자기 상해에서 온 청년이었다. 먼저 도착한 김규식은 김인태를 의심했다. 파리에 도착한 김인태는 일본의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장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를 처단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막상 거사하려고 행장을 풀어보니 깊숙이 숨겨놓았던 권총이 없었다. 권총 없이 거사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김인태의 권총을 빼돌린 사람은 파리에 와있던 김규식이었다. 암살 음모를 눈치챈 김규식이 김인태를 설득하였다. 민족의 울분에 그것도 가당치만, 더 큰 회의 참석의 대사를 그르칠까 만류하였다.

"설사 암살에 성공한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한국을 독립시킬 수도 없는 것이요. 도리어 이곳에 온 우리의 목적을 그르치게 하고, 세계의 동정을 잃기 쉬우니 삼가는 것이 좋겠소."

김규식의 말은 옳기도 했다. 일본의 대표를 암살한다고 하여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 온 목적이 독립청원만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널리 알리는 일이었다. 암살로 인해 한국 대표부가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권총도 없는 상황에서 암살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규식은 김인태에게 같이 영어와 프랑스어로 된 통신전을 만들자고 하였다. 김인태는 미국으로 가기위한 준비로 영어를 숙달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김인태가 김규식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그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인정하는 공식 단체의 대표는 아니었다.

1차 대전 후 파리강화회의는 세계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무대였다. 때문에 독립을 열망하던 수많은 약소민족들은 파리강화회의를 독립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은 패전국 식민지에 한정한다는 것이 전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독립문제가 상정되기를 기대했던 승전국의 식민지들도 파리강화회의에 각종의 청원서를 제출하며 외교활동을 펴나갔다. 30여 개의 승전국 식민지, 패전국 식민지, 승전국이나 패전국 식민지와 무관한 약소 민족 등이 저마다 청원서를 제출했다. 한국도 그중의 하나였다.
덧붙이는 글 작가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파리강화회의 #의열단 #박재혁 #김인태 #김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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