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기다리며 책 표지
소준섭
<워싱턴포스트>는 1995년에 지난 천 년 동안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하였다. 선정 이유는 "칭기즈칸은 사람과 과학기술의 이동을 통하여 지구를 좁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세계를 뒤흔들고 근본적 변화가 오게 만들었다"라 밝혔다.
북방의 유목민족 몽골이 세계를 제패하고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대제국을 만들어낸 데에는 바로 칭기즈칸이란 '영웅'이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 칭기즈칸은 탁월한 능력과 지도력으로 몽골 민족을 단결시키고 그 역량을 극대화함으로써 마침내 세계적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쓰러져가는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 역시 다른 사람이 결코 대체할 수 없었던,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끝없이 기울어만 가던 민주화운동 진영
1992년, 민주화운동 진영은 속절없이 조락해가고 있었다. 바로 전 해인 1991년, 소련은 해체되었다. 1992년 4월, 운동세력은 대학생 강경대 폭행치사 사건에 저항해 마지막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속수무책, 무력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과 정원식 국무총리 밀가루 세례 사건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완전히 보수, 아니 극우 쪽으로 기울어졌다.
사람들은 왜 영웅을 기다리는가?
이러한 우울한 사회 분위기에서 필자는 이른바 '혁명론'에 토대를 둔 기존의 운동 방식은 비현실적이며, '투쟁 만능주의'가 아니라 이제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정책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간 민주화운동이 축적해온 인적 물적 토대 위에서 '지도자'와 '인물'을 내세워 정치적 대안으로 성장하고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구상을 책으로 쓰기로 생각하였고, 그래서 1992년 5월에 책이 출간되었다. <영웅을 기다리며>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사람들은 왜 영웅을 기다리는 것일까?
인간들은 역사적으로 영웅을 고대하며 살아 왔습니다. 특히 난세에는 영웅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시대가 안정되면 행정가가 필요하고 실무가가 요구되지만, 난세에는 혁명가와 개혁가를 기다립니다. 무질서와 혼란을 평정할 수 있는 영웅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특히, 난세에는 기득권 세력이 약화되기 때문에 각 개인의 능력이 발휘될 가능성이 많아 영웅이 만들어지기 쉽습니다. <영웅을 기다리며>, 154쪽
'인물'이 있어야 '운동'도 산다
이어서 <영웅을 기다리며> 책은 대중가요도 스타가 없으면 전체 대중가요계가 시들해지며, 영화계도 마찬가지고 프로야구를 비롯한 스포츠 역시 동일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인물이 있어야 운동도 살 수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내놓는다.
운동진영도 '인물론'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 볼 시점입니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운동의 위기는 대중적 인물(지도자)을 만들어내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지도자가 구체화되지 않는 조건에서 운동이 대중들의 희망으로, 정치적 대안으로 부각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인공 없는 영화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책> 157쪽.
지도자의 역할은 막중합니다. 대중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인물'을 만들어낸다면 운동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대중적 희망의 토대 위에 대중과 함께 전체 운동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운동도 '조용필'을 만들어내야 하고 '최진실'과 같은 신인 스타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제까지 운동은 인물을 키워내는 데 너무나 인색했습니다. 인물이 있어야 운동이 산다는 명제를 깊이 명심해야 할 시점입니다. <책> 158쪽.
<영웅을 기다리며> 출간 10년 뒤 '영웅'에 가까운 인물이 나타났다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니, 1992년 <영웅을 기다리며> 책이 나온 10년 뒤에 '영웅'에 가까운 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는 영웅에 가까웠고, 최소한 '접근한' 인물이었다.
지금 다시 우리의 영웅은 나타날 것인가?
책을 다시 펼쳐보니 "대중적 명망을 갖는 지도자의 존재, 합리적인 정책대안, 도덕성의 견지 그리고 건강한 비판과 실천 속에서 대중들의 신뢰를 받는 유력한 정치적 대안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지적일 것이다.
부족하고 모자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진지하고도 겸허하게 반성하고, 시민이 진정으로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 제도의 구체화를 향한 집단지성을 발휘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고 더욱 발전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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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학 박사, 국회도서관 조사관으로 근무하였고, 그간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왔다. <이상한 영어 사전>, <변이 국회의원의 탄생>, <논어>, <도덕경>, <광주백서>, <사마천 사기 56>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시민이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그리고 오늘의 심각한 기후위기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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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영웅'이 있었다, 최소한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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