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장아찌 무침소금물에 삭힌 고추를 꺼내 물기를 빼고 양념을 했더니 고기랑 짝꿍이 될 정도로 잘 어울리는 반찬이 되었습니다.
장순심
드디어 냉동실의 돼지고기 안심 1.7킬로그램만 남았다. 남은 고기로 여러 가지 조리법을 떠올렸지만, 많은 양을 단번에 해결하기에는 장조림만 한 것이 없어 보였다. 돼지고기 장조림은 처음 하는 것이었지만, 음식 만드는 것에 겁을 낼 만큼 초보가 아니니 과감하게 도전했다.
해동된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끓는 물에 생강을 넣고 적당히 데쳐 잡내와 불순물을 제거했다. 다음으로 냄비에 적당히 물을 붓고, 간장, 물엿, 설탕, 맛술, 커피 가루를 섞은 양념에 통마늘을 넣어 푹 졸였다. 최근에 만들었던 음식들의 맛이 괜찮았기에 인터넷에 떠도는 레시피를 따라 만드니 한동안 먹을 수 있는 장조림이 완성되었다.
장조림의 짝도 삭힌 고추 무침과 동치미 무 무침이었다. 직접 조리해서 상에 올리니 예전에 친정어머니가 장독대에서 꺼내 순식간에 무쳐 따뜻한 밥과 함께 상에 내놓던 그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당시의 어린 입맛은 그것들의 깊은 맛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빛바랜 그것들은 양념을 해도, 어른들이 맛있다고 해도 전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어른의 맛이고 추억의 맛인 장아찌
나이를 먹은 지금은 그런 음식들에 손이 더 간다. 식당에 가도 그것들이 있으면 귀한 음식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주인의 수고와 정성도 느껴진다. 그런 귀한 음식을 내가 만들어 상에 놓으니, 친정어머니의 기억까지 더해져 더 특별한 음식이 되었다. 새로운 반찬을 만들어낸 뿌듯함에 특별한 의미까지 부여해서 아이들에게 풀어놓으니, 이미 다 자란 아이들은 묵묵히 들어주고 맛있다며 먹어주기도 했다.
봄과 함께 시작된 고기 파티, 그리고 겨우내 묵힌 것으로 만든 고추 장아찌와 무 장아찌 무침. 어른의 맛이고 추억의 맛이며 엄마와의 기억이 떠오르는 맛이었다. 베란다에서 잊히고 버려질 뻔한 것들의 가치의 재발견이었고, 아이들에게는 맛있음을 강요당한 기억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시장에 나가니 신선한 채소와 봄나물도 많았지만, 한쪽에 온갖 종류의 장아찌들이 막 나온 채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장아찌는 이 봄에 딱 맞는, 어쩌면 사계절 내내 식탁을 넉넉히 채울 수 있는 훌륭한 재료인지도 모른다.
이규보(1168∼1241)의 시문집 <동국이상국집〉에는 "순무를 장에 넣으면 여름철에 먹기 좋고, 청염에 절이면 겨울 내내 먹을 수 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금은 사시사철 싱싱한 제 빛의 채소들을 볼 수 있지만, 그 모든 재료를 오래 먹기 위해 저장한 장아찌는 조상들의 삶의 지혜였고 가난한 식탁을 풍성하게 했다. 절이면 봄이고 여름이고 우리 식탁에 딱 어울리는 반찬인 장아찌를 올해는 버려지는 것 없이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2021년의 봄은 꽃들도 마스크를 하고 숨을 죽이며 조용히 피고 지는 것 같다. 길가의 화단에서 올라오는 새싹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삐죽 내미는 것 같다. 공원에서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봄바람을 맞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모두 조용조용하다.
때가 때인지라 밖으로 눈 돌리지 않고 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삭힌 것들의 맛을 발굴했는지도 모르겠다. 야단법석하는 봄이었으면 휴양지나 봄꽃 축제에 다니느라 또 잊히고 버려지고 했을지도 모르니, 코로나가 옛 맛을 찾아주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과한 걸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
공유하기
베란다에 오래 묵힌 이것, 지금 꺼내셔야 합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