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꾸미 샤브샤브주꾸미의 동글동글한 머리 부분을 나의 접시에 먼저 놓아주는 다정함이 참 좋았다
황승희
천주교를 믿는 바람에 흑산도로 귀양을 갔다는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주꾸미를 한자어로 준어(蹲魚), 속명은 죽금어(竹今魚)라고 썼다고 한다. 주꾸미를 좋아하는 남자친구 덕분에 처음 먹어보게 되었다. 남자친구와 봄이면 수산물 시장을 갔다. 구경하는 재미부터 별미다. 머리 큰 놈으로 즉석에서 샤브를 해 먹는데 정말 이 세상 맛이 아니었다.
남자친구는 푹 끓여 먹는 편이지만 나는 가볍게 살짝 익혀야 보드랍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주꾸미의 동글동글한 머리 부분을 내 접시에 먼저 놓아주는 다정함이 참 좋았다. 머리 부분을 씹을 때 그 알의 꼬돌꼬돌한 식감이 재밌고 고소한 게 참 맛있다. 냉이를 넣고 끓이는 것도 신기했고 검은 국물에 라면을 끓여서 마무리하면 완벽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 미끄덩한 생물의 느낌이 여전히 낯설었다. 끓는 물에 살아있는 것을 넣는다는 것, 이 거부감이 더 문제였다. 고통을 수반한 동물의 죽음이 순식간에 식사로 변하는 장면은 불편했다. 죄지은 것 없는 저 착한 눈은 어쩔 것인가? 저것은 식자재가 아니라 생명이지 않나. 투신당하여 인간에게 공양되는, 온몸으로 저항하는 모습에 동족상잔의 비극을 느끼는 것은 나뿐인 걸까?
살아있는 바닷가재를 끓는 물에 넣으면 형사 처벌을 받는 스위스나 '산 낙지 규제'라는 녹색당의 공약에 너무 공감하는 이유이다. 그리하여 그 잔인한 행위는 남자친구가 다 하는 걸로 하고 나는 눈을 감고 죄책감을 덜기로 했다. 탱글탱글한 바다의 맛에 나의 남은 죄책감마저 함께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