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 서울을 가리켜 '눈뜨고도 코 베이는 곳'이라 하던 옛말의 뜻을 두고두고 되새기게 된 사건은 신촌역 4번 출구로 향하는 계단 위에서 벌어졌다.
연합뉴스
나는 이십 대 중반에 처음 강사 일을 시작했다. 당시 내가 근무했던 학원은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 있었는데, 읍 단위 시골에서 나고 자라 그때까지도 촌티를 벗지 못한 내게 그곳은 마치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출퇴근 길마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주는 위압감에 바짝 얼어붙어서 정신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리곤 했다. 돌이켜 보면 아는 사람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서울에 손바닥만 한 방을 얻어 혼자 살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주눅 들었던 모양이다.
늘 사람들로 북적이던 복잡한 신촌 거리를 가로질러 학원에 갈 때면, 서울을 가리켜 '눈뜨고도 코 베이는 곳'이라 하던 옛말이 절로 떠올랐다. 내가 그 말의 뜻을 두고두고 되새기게 된 사건도, 바로 그즈음 거기서 벌어졌다.
나는 그날 신촌역 4번 출구로 향하는 계단 위에서 봉변을 당했다. 생전 처음 보는 웬 남자가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선 내 오른쪽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가 그대로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아래위로 정장을 빼입고 한 손엔 서류 가방을 든, 멀쩡해도 너무 멀쩡해 보이는 삼십 대 중반의 젊은 남자였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놈이 유유히 출구를 빠져나가고 난 뒤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나라는 인간의 존엄이 길바닥에 널브러진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그날 겪은 일이, 여자들 사이에선 '난이도 하'에 해당하는 상당히 가벼운 에피소드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했다. 반지하 방에서 자취를 하던 친구는 여름에 창문을 열고 자다가 방충망을 뚫고 들어온 이웃 남자의 커다란 손을 목격한 이후, 학을 떼고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몇 년 전 함께 일했던 동료 강사는 헤어진 남자친구가 한 달 넘도록 계속 집 앞으로 찾아와 다시 만나 줄 것을 요구하며 협박하기에 결국 경찰까지 불렀지만, 별 소용이 없었단다. 그녀는 직장을 관두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자취방을 옮겼다.
2019년 기준 서울시는 전체 380만 가구 중 34%에 달하는 130만 가구가 1인 가구다. 그리고 그중 여성의 비율은 절반이 조금 넘는 53%에 이른다. 나는 나를 포함한 그 53%의 안전이 늘 걱정스럽다. 그간의 직·간접 경험을 종합해 본 결과, 서울은 여성들에게 결코 호락호락한 도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시는 그동안 '여성 안심 특별시'라는 슬로건 아래 다양한 여성 정책들을 펼쳐왔다. 24시간 운영되는 편의점의 특성을 살려 서울시 800여 개 편의점을 '안심 지킴이 집'으로 위촉해 위기 상황 시 긴급 대피소가 되도록 한 것이나, 여성들의 늦은 귀갓길에 동행이 되어주는 '안심 스카우트 제도' 등을 운영해 온 것도 그 일환이다.
혼자 사는 여자도 안심할 수 있는 안전한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