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민 공모로 지어진 도서관 내 공간들의 이름을 새긴 나무현판들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기존의 공립 도서관은 저녁부터 밤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고, 떠들 수도 없는 시스템이잖아요. 아이들이 자유롭게 책과 함께 어우러져 놀 수 있는 시스템이 없죠. 그래서 공공 도서관에선 할 수 없는 영역들을 우리의 자치로 보완하자는 뜻이었어요." (강은경씨)
산책도서관 '지킴이'로 나선 주민들이 시간을 나누어 맡고 오전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운영했다.
"처음엔 정말 이용자 입장에서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을 만들자고 생각하며 열었지만, 지킴이를 하다 보니 점점 벅차기 시작했어요. 관리자의 입장도 느끼게 되더라고요. 책임감도 무거워지고, 관리자의 입장에서 이용자를 제한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내면에서 갈등이 생긴 거죠. 지킴이인 우리도 이 공간에서 행복해야 하잖아요. 책임감에 얽매어서 지키기는 힘들다는 생각에 작년 하반기부턴 오후 2시부터 6시까지만 운영하는 것으로 조정했어요." (황정란 대표·강은경씨)
여기서 주민들은 산도 보고, 책도 보고, 각종 소모임도 열었다. 때마다 토론의 장, 교육의 장, 놀이의 장으로 변신했고, 도서관 문화제와 구례의 작은 도서관들이 함께 준비한 작은도서관 한마당 '작당'도 열렸다. 산책도서관에는 책과 사람들, 이야기가 정겹게 흘렀다. 공공도서관에 비하자면 산책도서관은 간판도 없이 아주 조촐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넓은지도 모른다.
공공도서관을 정수기라고 한다면 산책도서관은 강물과도 같다. 공공도서관에는 더 발전된 기술로 필요한 서비스를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편리함이 있다면, 산책도서관은 때로 부족함도 많고, 두서없이 흘러가는 것 같지만 서로 모르던 사람들을 모아 이웃이 되게 하고, 이야기를 풀어놓게 하고, 마을이 되게 하고, 서로를 돌보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 좀 떠들어도 되고, 좀 드러누워도 되는 편안함도 있다.
지난해 여름, 구례는 사상 최악의 수해를 입었다. 구례 오일장 골목도 예외 없이 홍수에 잠겼다. 산책도서관 사람들은 피해 주민과 봉사자들을 위해 도서관을 쉼터로 개방하고, 구호 물품들을 모아 피해 주민들에게 나누어줬고, 평범한 동네 어르신들도 '아~ 거기? 물건 나눠주는 곳?' 하고 산책도서관의 존재를 알게 됐다.
도서관은 성장하는 유기체
개관한 지 1년이면 아장아장 어린 도서관이지만 주민들의 열정과 지혜로 이미 많은 일을 해냈고, 코로나에 수해까지 거듭 어려운 상황들도 겪어내야 했다. 코로나로 휴관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산책도서관을 꾸려가는 이들은 지금 어느 때보다 긴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됐다.
황정란 대표는 그동안 준비된 역량을 고려하지 못하고 많은 사업을 진행하느라 내부소통에 많은 에너지를 쏟지 못했다고 솔직한 성찰을 털어놓았다. 깊고 치열한 논의를 나눈 지난 두 달여는 건너뛸 수 없는 소중한 성장통의 시간일지도.
"도서관 운동이라든지 밀착된 도서관 서비스와 도서관 기능의 활성화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난해를 겪으며 도서관 기능보다 지역 커뮤니티 공간으로 확장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확인하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은 합의하는 과정에 있어요. 대화를 통해서 산책의 정체성과 활동 목적 등이 다시 정립될 것 같아요. 실제 이용자들 입장에서도 변화가 있을 거예요. 인터뷰를 하는 이 시점이 바로 과도기네요." (강은경씨)
"사실 논의 속에서 그보다 중요한 점은 누군가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누리는 형태가 아니라, 누구나 함께 참여하고 함께 책임지는 공간을 구현하자는 얘기였어요. 그래야만 정말 주민들 속에 안착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현재 지킴이와 운영진은 20여 명 정도 되는데요. 50명~100명 정도의 주민들이 참여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논의 구조부터 오픈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요. '실험해보자. 안 되면 다시 해보면 되지'라고 생각해요." (황정란 대표)
도서관학을 전공하면 꼭 배우는 내용 중에 '도서관학 5법칙'이라는 게 있다. 인도의 수학자이자 사서인 랑가나단이 세운 법칙인데 지금까지도 도서관의 기본 운영 법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한다.
그 중 다섯 번째 법칙이 바로 '도서관은 성장하는 유기체다'라는 내용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회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여러 도서관 전문가들이 도서관의 운영이나 형태가 점점 책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변화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책 중심의 다양한 서비스나 그럴듯한 대출 반납 시스템이 없더라도 '산책도서관'은 이미 훌륭한 도서관이다. 어떤 모습, 어떤 이름이든 구례 주민들이 지성을 기르고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뿌리내리고 있음은 틀림없다.
산보고책보고작은도서관에서 공유공간 산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