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교면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희씨. 음료를 마시고 있어서 잠깐 마스크를 벗었다.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무상급식 중단은 전통적인 보수 텃밭으로 알려진 경남도에 이례적인 바람을 몰고 왔고, 각 시·군 주민들이 아이들 '밥'만은 지켜야 한다며 동시다발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면 단위로는 드물게 초·중·고가 하나씩 있는 데다 진주와 광양 등 인근 도시로 출퇴근하는 젊은 세대가 많은 진교에서도, 학부모를 중심으로 연일 피켓 시위가 열리고 선전물이 돌았다. 그때의 기억을 여전히 뜨겁게 간직하고 있는 정희씨는 말한다.
"그전까지는 다들 누구 엄마, 누구 아내로만 알고 지내다가 무상급식 싸움을 계기로 서로 얼굴 맞대고 같이 뭔가를 하게 된 거예요. 그러던 중 남자 양육자들이 '밥이 빛나는 밤에' 행사를 진행했는데, 아이들과 보호자들이 함께 어울리는 그 시간이 참 좋았어요. 그런 경험들이 '아이날다'를 만들고 지금까지 유지해온 원동력이죠. 농담 삼아 우리끼리 그래요. 다 그분 덕분이라고(웃음)."
무상급식 싸움 현장에서 만난 학부모들 가운데 다섯 가족이 뜻을 모아 만든 '아이(i)날다'는 2016년부터 해마다 민다리체육공원에서 어린이날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어린이날이 되어도 인근 도시에 나가 즐길 수 없는 동네 아이들과 '같이 놀자'는 취지로 시작한 이 행사는, 해를 거듭하면서 진교면을 대표하는 잔치로 성장해 이제는 후원과 참여가 줄을 잇는다. 아이날다가 벌인 '노는 판'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여들어 크게 어울리는 모양새라 할까.
아이날다의 또 다른 주요 행사인 '가슴 따뜻해지는 산타 이야기'도 면사무소, 농협,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등 진교 내 단체들과의 협력 관계 안에서 치러진다. 코로나19에 손발이 묶여 있던 지난해 크리스마스에는 대면 프로그램이 무산된 대신 다른 해보다 더 풍성한 선물 꾸러미를 마련해 '드라이브 스루'로 전달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건 역시나 지역과 맺어온 그 탄탄한 '관계' 덕분이었다.
"무상급식 싸움할 때 '그런다고 되겠냐'는 말을 종종 들었어요. 아이날다를 보는 시선도 처음엔 비슷했던 거 같아요. 너희가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냐는 거죠. 안 하던 걸 하니까 반감도 있었을 테고요.
그런데 지금은 칭찬들을 많이 하세요. 쟤네가 아이들을 위해서 뭔가 한다더라, 가보니 잘하더라, 이런 말들이 입소문으로 돌면서 생긴 변화예요. 이제는 아이날다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우리도 끼워줘' 하고 손 내미는 곳이 많아요. 여전히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긴 하죠. 너무 자기들끼리 뭉친다고도 하고. 이건 우리가 계속 고민하며 풀어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해요."
더 좋은 삶을 위해 교집합을 늘려가는 사람들
아이들 밥에서 촉발된 이정희씨의 활동은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해내는 자연 친화적 농사 모임을 결성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시작은 유정란이었다. 산에서 닭 키우는 분을 알게 된 정희씨 부부가 몇몇 가족을 모아 건강한 달걀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작은 공동체를 꾸린 것.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류독감이 발생해 닭을 폐사하게 되면서 농사로 방향을 틀었다. 마침 한 회원이 안 쓰는 비닐하우스를 내주어 일이 수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누리농장' 300평(초기엔 150평으로 시작) 땅에서 회원들은 무농약, 무비료, 무경운의 원칙을 고수하며 '자연 그대로의' 농사를 지었다. 다들 농사에 문외한이어서 어설픈 점도 많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까지 데려와 왁자하게 떠들며 흙 만지고 땀 흘리는 시간은 마냥 즐거웠다.
게다가 땅이 베푸는 은혜는 어찌나 한량없던지! 회원들이 충분히 나눠 먹고도 늘 수확량이 남아돌아, 연회비 2만 원에 모집한 후원회원들에게는 물론 길에서 만난 이웃에게까지 수시로 채소꾸러미를 안겨줄 정도였다고.
"처음엔 회원들 각자가 자기 몫의 땅에서 농사짓는 식으로 운영하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땅을 나누지 않고 공동으로 관리하는 체제로 바꿨어요.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일을 더 하는 사람과 덜 하는 사람이 드러나지만 그걸 문제 삼진 않아요. 같이 가는 게 더 중요하니까 서로 배려하고 봐주죠.
다만 올해부터는 노지 400평이 늘어나 그만큼 일이 많아졌고 후원회원 연회비도 6만 원으로 올려서 부담이 좀 있어요. 그래서 지난 총회 때 책임감을 더 갖자는 뜻에서 회원 전부가 하나씩 직함을 달았어요. 땅을 기증해준 부부는 대부 대모, 농기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기술이사, 나머지는 조직부장, 감사 이런 식으로."
현재 아이날다를 구성하는 여덟 가족 중 반 이상이 누리농장에 함께하고 있으며, 또 아이날다와 누리농장의 회원 일부는 정희씨가 가장 최근에 꾸린 여성주의 글쓰기 모임 '연연하다'의 '글 도반'이기도 하다.
고백하자면 그이는 오래전부터 '여자들만'의 모임을 갈망해왔다. 가부장제의 영향력이 강한 시골일수록 여자들이 무엇이든 자유롭게 표현하고 발산할 수 있는 자리가 더욱더 절실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마침내 일을 벌인 건 지난해 '작은변화 지역 활동가'로 선정되고 나서다. 지원받은 활동비로 '여성 글쓰기 강좌'를 열어 동네 여자들을 하나하나 불러모은 게 그 첫걸음이었다.
4회의 강좌와 그 이후 정기적으로 지속된 모임은 한마디로 '눈물의 향연'이었다고 할 만하다. 일곱 명의 여자들은 그동안 묵혀두고 감춰둔 이야기를 말과 글로 토해냈고, 그때마다 아낌없이 눈물을 쏟았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나'보다도 엄마와 아내와 며느리라는 '역할'이 더 중요해질 수 있음을 모르지 않으나, 그들은 적어도 글을 쓰고 나누는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로 존재하며 내면의 소리를 따라가고자 했다.
"여성주의라는 단어를 내걸고 시작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여성으로서 겪은 아픈 이야기들이 나오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흘러가더라고요. 강좌 첫 시간부터 다들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우리 왜 이렇게 울지? 하면서 또 울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관계가 전보다 더 끈끈해졌죠. 글쓰기의 힘이 이런 게 아닌가 싶네요."
관계를 열어놓을수록 '작은변화'의 자리도 넓어질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