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오세훈 후보의 용산참사 막말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용산참사 현장에서 열고 있다(맨 왼쪽이 이원호).
이원호
목사의 꿈을 접은 이유
이원호의 고향은 강원도 정선이다. 아버지는 사북에서 광부로 일했다. 중·고교 시절에는 모범생이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선생님을 욕하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하던 순진한 학생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한 번도 서울에 가보지 못한 촌놈이었다. 목사가 되고 싶어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도시빈민선교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그곳에서 다른 세상을 만났다. 상상해보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났고, 재개발로 쫓겨난 사람들을 만났다. 목사가 된다고 그 사람들의 삶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목사의 꿈을 접고 '투사'가 되었다.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달동네 담장 무너진 거 쌓고 아이들 학습 도와주는 봉사 동아리인 줄 알았어요. 운동권 동아리인 줄은 몰랐던거죠(웃음). 재개발 지역의 공부방은 산꼭대기에 있어서 아이들하고 공 차다가 공이 밑으로 굴러가면 산비탈 따라서 공 주우러 가는 게 일이었어요. 재개발 때문에 없어진 공부방이 많았어요."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한 지 8년 만인 2017년, 한국도시연구소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도시연구소는 빈민운동 동아리 활동할 때 알고 있던 곳이다. 이원호가 대학 때 알던 도시연구소는 활동가들을 교육해서 파견하는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한국도시연구소로 전환해 재개발 이슈와 관련된 정책을 만들고 있다. 그곳에서 4년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6월부터는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로 복귀할 예정이다.
4월 7일 서울시 보궐선거 결과를 본 이원호는 참담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2009년, 그때로 돌아간 느낌이 강해요. 재개발, 재건축을 활성화할 조짐이 확실하고 다시 뉴타운 삽질의 시대로 돌아가는 거죠. 용산참사가 벌어지기 전에 대규모 도시개발을 통한 부동산 욕망이 들끓고 있었는데 그 정점에서 용산참사가 터졌고, 2009년 이후에는 부동산 침체기였어요.
이번 서울시 보궐선거에서 오세훈씨가 당선되기 전까지는 전면철거에서 도시재생으로 전환하는 시기였는데 도시재생이 뿌리내리기도 전에 다시 전면철거형 재개발의 시대로 돌아가는 거예요.
지역을 개발한다는 것은 개발구역이 정해지는 거잖아요. 이 개발구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철거민만의 문제라고 치부하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2009년에 용산참사가 벌어진 후 많은 사람들이 용산에 왔어요. 그때 반성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개발문제가 개발구역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그 지역 전체가 보수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이거든요. 지역단체들의 기반도 상실되는 과정이고요. 여기에 운동사회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철거민운동에만 머물렀다는 게 한계였어요.
도시개발의 역사를 보면 원주민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주택공급을 통해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주겠다는 거거든요. 그동안의 도시개발 역사에서는 원주민들은 재정착하지 못하고 10%, 15%만 정착을 해요. 나머지는 다 쫓겨나는 거죠. 그러면 주택공급이 늘어서 집 없는 사람이 집을 갖게 되었느냐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여전히 주택소유율은 그 전과 동일한 비율인 50~60%인 거예요. 새로 지은 집은 이미 집이 있는 사람들이 투기 목적으로 집을 사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투기목적으로 활용되었던 개발의 역사가 지금 우리가 느끼는 주거권의 박탈을 가져왔다고 봐요.
2006년, 2007년에 운동진영이 뉴타운 대응을 제대로 못해서 용산참사라는 사건이 터졌는데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 다시 재개발, 재건축 조짐이 보이는 이 국면에서는 제대로 대응해야 해요. 그렇게 못해서 또 끔찍한 사건이 터지면 안 되잖아요. 저는 두려워요."
순하고 착한 이원호의 입에서 '두렵다'는 말이 나오자 덜컥 겁이 났다. 그동안 겪었던 참사를 다시 겪지 않을까하는 불길함이 스쳤기 때문이다.
"주거권은 인간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
용산참사가 터지고 집회에 갔을 때, 이원호가 사회를 봤던 기억이 난다. 이원호는 보기 드문 훈남이었다. 거기다 꽤 차분하고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그랬던 그가, 집회에 가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어디서 그렇게 우렁찬 목소리가 나오는지 믿기 힘들 정도로 단호하게 구호를 외쳤다. 그 모습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말이라도 한번 걸어볼 수 있을까 하고 흑심(?)을 품었던 기억이 나서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느덧 용산참사가 터진 지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이원호는 당시에 빈곤사회연대 활동가였던 B씨와 결혼을 했다. 벌써 결혼 7년차라고 한다. 결혼식에도 못 가서 미안했던 나는 결혼생활은 어떤지, 둘 다 활동가인데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는지 등의 시시콜콜한 질문을 던졌다.
"얼마 전에 행복주택으로 이사했어요. 행복주택에 입주할 수 있는 조건을 보니까 결혼한 지 7년차인 사람도 된다고 해서 신청했어요. 결혼 7년차인 저희가 법적으로는 아직 신혼인가봐요. 역세권이고, 숲세권이에요(웃음).
저희는 고양이 두 마리와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고양이 한 마리가 당뇨에 걸려서 당뇨 주사를 시간 맞춰 놓아야해요. 그래서 인터뷰 끝나고 빨리 가봐야 해요. 활동가들의 경제적인 문제는 다 비슷하죠. 저희는 많이 쓰지 않으니까 그럭저럭 버틸만해요. 고양이한테 돈이 좀 들어가요."
쑥스러움이 많은 이원호는 개인적인 질문에는 단답형으로 말했다. 활동가로서 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냐고 하자, "잘못된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 하지만 조금씩 바뀌는 것들을 보면 이 삶(활동가의 삶)이 결코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단다. 그리고 아껴놨던 에피소드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