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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의 굴레에 대처하는 삼대 이야기

등록 2021.04.27 08:02수정 2021.04.28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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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 한창 때는 예뻐 보이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제아무리 가까운 곳이라도 집 밖을 나설 때면 뽀얗게 분칠을 해야만 마음이 놓였다. 발목을 접질려 가면서도 굽 높은 구두를 고수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타인의 시선에 무뎌지고, 외모 꾸미기에 용쓰던 것도 시들해졌다. 그저 남한테 추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에 만족하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도 마지막 자존심이라 여기며 여전히 무던해지지 못하는 건 '흰머리의 굴레'다.
 

집에서 혼자 염색할 수 있는 염색약이 다양하게 시판 중이다. ⓒ 박진희

 
나는 남들보다는 머리가 늦게 센 편이다. 그래서 영영 흰머리가 안 날 줄 알았다. 아니다. 흰머리가 안 났으면....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락없이 내 머리에도 어느 날부터인가 한 올 두 올 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어찌나 눈에 거슬리던지 보이는 족족 뽑아댔다. 한 번 뽑으면 다시는 안 난다고 주변에서는 만류했지만, 내 딴에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어서 뽑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큰 거울 앞에 서서 흰머리를 뽑는 날이 거듭되다 보니, 한 자리에서 100개까지 뽑는 날이 들이닥쳤다.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심각해지자 결국 새치 염색을 하러 미용실을 찾게 되었다. 한창때 멋 부리느라 머리카락을 물들일 때와 영판 달라서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쭈뼛쭈뼛 새치 염색을 부탁했다. 염색을 마치고도 원하는 색이 예쁘게 나왔는지를 살피기 전에 흰머리가 잘 가려졌는지 눈에 불을 켜고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팔뚝이 저리도록 흰머리를 뽑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라 하던 해방감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염색하는 횟수가 늘자 얼마 못 가 염색을 하고 나면 두피가 가렵고, 군데군데 뾰루지가 올라왔다. '염색약 알레르기'였다.

병원에서 처방받고 약 먹으면 가라앉는다는데, 이쯤 되자 '그렇게까지 해가며 머리 염색을 해야 하나?' 회의가 들었다. 눈부신 백발을 날리는 어르신들을 뵈면 '새치난 머리보다는 차라리 하룻밤 자고 나면 저렇게 새하얀 백발이 돼 있으면 좋겠다' 하고 바라기까지 했다.


뽑을 수도 없고, 머리 염색도 여의치 않자 차선책으로 모자를 쓰고 다니게 됐다. 모자는 흰머리를 감추기에 제격인데, 가끔 모자를 벗고 볼썽사나운 머리칼을 드러내야 할 때는 보통 난감한 게 아니다. 그래서 빈번하게 염색하자니 여러 가지 여건이 마땅찮으니 급할 때만 어쩌다 한 번씩 셀프 염색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호호백발만은 보여 주기 싫다던 할머니와 어머니
 

어머니 세대만 해도 작은 갈색 약병에 나오는 모발 염색제를 많이 썼다. 가루형 염색약을 물에 개어서 사용한다. 집에서 혼자 하는 셀프 염색은 염색약이 골고루 묻지도 않고, 잘 빠지지 않아 염색약이 침구 여기저기에 묻는다. ⓒ 박진희

 
도대체 머릿속에 무슨 일이 생겼지? 염색을 자주 하는 것도 아닌데, 최근에 잘 시간만 되면 머릿속이 근질근질하다. 가려움이 가라앉을 때까지 검지 손톱으로 정수리 일대를 여러 차례 긁게 된다.

하얗게 세는 머리칼이 날로 느나 싶어 내심 걱정이다. 그러다 문득 어릴 적 할머니께서 가끔 "와서 머리 좀 긁어라" 하시던 기억이 떠올랐다. 할머니께서 베개에 머리를 뉘면 나는 양손 엄지손톱을 마주하여 할머니 두피를 힘줘가며 쪼아댔다. 흡사 옷이나 이불에 붙은 이나 벼룩을 잡을 때처럼. 그렇게 해 드리면 할머니께서는 엄청나게 좋아하셨다. "이게 그렇게 시원하세요?" 여쭈면, "너도 늙어봐라. 이다음에 알게 될 거다" 알쏭달쏭한 대답을 하셨다.

항상 까맣게 머리를 물들여 정갈하게 쪽지시던 할머니가 그리하셨던 것처럼 어머니도 미용실에 가지 않고 꼭 집에서 머리 염색을 하신다. 미용실에서 염색하면 금방 색이 빠진다는 게 이유였다. 또한 시중에는 모발 손상이 적은 좋은 모발 염색제가 나와 있는데도 여전히 약국에서 파는 값싼 염색약으로만 머리를 물들인다. 한 병으로 여러 번 염색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수십 년을 그 염색약만 써온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정수리가 휑해져 볼썽사납다. 

"인제 그만 백발로 다니시면 어때요?"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들도 관리만 잘하면 멋스럽다고 종용해도 소용없다. 그건 머리숱 많은 사람들 얘기라며 들은 척도 안 하신다. 백발로 다니는 건 싫지만, 탈모는 은근 걱정이신지 샴푸도 예사 것은 안 쓰고, 두피에 좋다는 마사지 오일도 잊지 않고 챙겨 바르신다.

그러다 한 날은 "김수미 두건 좀 알아봐라" 부탁하시길래 꽃무늬 들어간 것으로 사 드리려 했더니, "너무 비싸다. 관둬라" 만류하신다. 값도 값 이려니와 앞치마와 함께 쓸 때만 어울리는 걸 알아채신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모자 하나를 장만하려던 참이다. 칠순에도 백발만큼은 남들한테 보여주기 싫은 울 엄마께 어울릴 만한 꽃모자도 골라 봐야지.
#흰머리 #염색약 #인생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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