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아버지 손문과 대한민국의 아버지 신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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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관이 망명지로 택했던 1911년 경에는 상하이 거류 동포는 이보다도 더 적었을 것이다. 만주와 연해주는 동포가 많고 고국과 가까운 이점이 있었으나 일제의 영향권이고, 미국ㆍ하와이는 안전하지만 고국과 너무 멀어 독립전쟁을 일으키기에는 불리했다. 상하이는 두 지역의 중간지대인데다 조계지역이고 국제도시여서 국제여론을 일으키기 쉽겠다는 판단이었다.
예관의 선구적인 역할은 신해혁명을 주도한 손문의 '중국동맹회'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가입하여 무창혁명(武昌革命)에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중국혁명세력과 손을 잡게 되었다.
그는 국치 이후 첫 해외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결성, 신한혁명당조직, 「대동단결선언」주도, 항일잡지 『진단주보』발행, 「무오독립선언」에 참여한 데 이어 1919년 3월 여운형ㆍ선우혁 등과 상하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함으로써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마침내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예관 선생은 임시의정원 부의장과 법무총장,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하여 혼란기 임시정부를 수습하고 광동특사로 손문 총통과 만나 외교문서를 증정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 호법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 승인되었다.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해낸 예관 선생은 이승만의 국정농단을 둘러싸고 임정이 혼란 상태에 빠져들자 심장병과 신경쇠약으로 병석에 누워 25일 동안 불식(不食)ㆍ불어(不語)ㆍ불약(不樂)으로 시종하다가가 "정부, 정부"를 부르짖으며 숨을 거두었다.
32세에 망명하여 42세를 일기로 눈을 감을 때까지 한번도 고국땅을 밟지 못한 채 이역에서 순국하였다. 동료들이 더 이상 분열하지 말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합하라는 유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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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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