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하 열사.
김동석 화가
1991년 5월 10일 오후 6시 30분경 전남대 대강당 화장실에서 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온몸에 불이 붙은 청년이 대강당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노태우 정권 타도'와 '노동해방'을 외쳤고 이내 쓰러졌다. 주위에 있던 대학생들이 달려들어 소화기로 불을 끄고 급히 그를 전남대병원으로 옮겼다. 도착할 당시 청년은 전신에 화상을 입은 참혹한 모습이었다.
청년이 누구인지는 한참 있다 경찰에 의해 밝혀졌다. 밤늦게 그의 가족과 연락이 됐고, 다음날 새벽 아버지와 형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월 12일 0시 1분, 형이 눈물로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고 말았다. 이름은 윤용하, 스물두 살의 작고 왜소한 청년이었다.
열네 살 때부터 노동을 했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
윤용하 열사는 1969년 전남 순천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초등학교를 5학년 때 그만두어야만 했다. 그리고 1983년부터 중국집 배달을 시작했다.
이후 열사는 여러 곳에서 노동일을 하다 1989년부터 '성남피혁'이란 회사에서 노동자 생활을 했다. 이때 대학 출신의 활동가를 만나 사회 현실과 노동자의 참된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 그는 1990년 봄에 '민주직장인청년연합'(아래 민직청) 회원으로 가입했다.
민직청은 직장인을 대상으로 청년운동을 벌여나가던 단체였다. 회원 수는 150여 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된 학생운동 출신들이 많았다. 당시 민직청은 회원이 되려면 정회원 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열사도 정회원 교육을 마치고 문화분과 소속인 풍물패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했다.
민직청 시절 사람들은 그가 모임에도 적극적이었고, 뭐든지 열심히 배우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풍물패 반장이었던 박영주씨의 기억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내게 장구를 배우는 용하의 모습입니다. 빨리 배우지는 못했어요. 몇 번을 알려줘야 했고 그마저도 자주 까먹었죠. 하지만 배우려는 의지는 대단했어요. 이 기억만큼은 또렷이 나네요."
민직청 풍물패와 시사토론모임에 적극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