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쌓인 대종교 3대종사 묘소.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 대종사
조종안
단군교는 단군조선 시대부터 명칭을 달리하면서 면면한 전통으로 이어졌다. 부여에서는 대천교, 예맥에서는 무천, 마한에서는 천군, 신라에서는 숭천교, 고구려에서는 경천교, 발해에서는 진종교, 고려에서는 왕검교, 만주에서는 주신교, 기타 다른 지역에서는 천신교라 불리면서 개국주(開國主) 단군을 받들었다.
단군숭배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단군교는 고대시대부터 단군을 시조(始祖), 국조(國祖), 교조(敎祖)로 신봉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단군교는 사찰 본당과 대웅전의 뒷켠 삼신각에서 간신히 잔명을 유지하고, 유교가 국교가 되면서는 공자나 주자에 밀려났다. 기독교(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우상'으로 전락되고 일제강점기에는 말살의 대상이 되었다.
단군(교)의 존제가 역사현장에 새롭게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 몽골제국에 맞서 싸우면서 내부적으로 민족의식ㆍ민족적일체감이 형성되면서부터이다. 안으로는 무인정권의 폭압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세계를 제패한 몽골의 침략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된 민족수난기에 내적인 민족통합의 정신적 일체감이 단군을 구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단군을 국조로 하는 일연 선사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편술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민족적인 위기를 국조를 중심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몽골제국이 13세기 초에서 중엽까지 80여 년 동안 고려의 정치에 간섭할 때 나타난 단군교가 20세기 초 일제의 침략으로 다시 국권이 위태로와지면서 국권회복의 구심체로서 부활하였다. 몽골침략 이후 7백여 년간 단절되었던 단군교가 1910년 8월 5일 나철이 대종교로 교명을 개칭하면서 국난극복의 '구원투수'로 등장시켰다.
엄격히 말하면, 선생은 비단 혁명가일 뿐만 아니라 종교가이기도 했다. 선생께서는 한국을 광복한다는 일을 오로지 하나의 공작이나 포부로만 생각 않으시고 일종의 종교요, 일종의 신앙으로 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께서는 더욱 정의(正義)에 대해서나 혁명에 대해서나 벗에 대해서나 청년에 대해서나 한결같이 솔직하고 참된 마음과 곧은 의협심을 보이셨던 것이다. 실제로 선생은 원래 한 종교도(倧敎徒)라 할 수 있다. 국내에 계실 때 선생은 은인인 대종교(大倧敎)의 종사 나홍암(羅弘巖, 이름은 喆) 선생에게 세례를 받고 대종교를 매우 독실히 믿으셨다. (주석 1)
국치를 눈앞에 두고 있는 참담한 시기에 이들은 국민정신을 하나로 모아 일제에 저항하고자 대종교의 중광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총독부의 온갖 탄압으로 포교활동이 쉽지 않았다.
주석
1> 민필호, 앞의 책,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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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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