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대통령 박근혜씨와 '비선실세' 최서원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월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유성호
김영삼 정권 때인 1995년, 광복절 특사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박기석 삼성건설회장, 정태수 한보그룹 명예회장, 황경로 전 포항제철(포스코) 회장 등이 혜택을 받았다.
광복절 특사가 발표된 다음날 나온 8월 12일자 <경향신문> 기사 "정부·재계 '신협력시대'"에 따르면, 황정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부회장은 이 조치를 영단(英斷)으로 치켜세우면서 "정부의 영단이 경제인들의 활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한 뒤 "이를 계기로 투자 등 경제 활동이 활성화돼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것으로 본다"고 평했다.
이런 발언에서도 나타나듯이 재계 단체들은 재벌총수가 법의 심판을 받을 때마다 '사면이 투자 활동 등을 촉진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런데 이런 주장과 대비되는 사실이 있다. '사면이 경제 활성화에 이롭다'는 논리를 앞세워 사면 운동을 펼치면서도, 사면과 경제 활성화 사이의 인과관계를 실증적으로 증명한 적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특정 재벌총수가 사면을 받은 뒤에 기업의 투자 활동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매출액이 얼마나 늘었는지, 주요 그룹의 재벌총수들이 한꺼번에 사면을 받은 뒤에 한국 전체의 수출입과 경제성장률이 어떻게 변했는지 등은 실증적으로 통계화될 수 있는 사안이다.
이런 자료들은 재벌그룹의 비서실 직원들도 얼마든지 작성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런 자료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재벌총수 사면은 경제 활성화에 유리하다'고 수십 년간 외쳐온 재벌 기업들이 아직까지 그런 통계를 내놓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만하다.
재벌총수를 사면해야 경영이 잘된다는 주장은 엄밀히 말하면 기업의 약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이다. 최대 주주가 자리를 뜨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주장은 전문경영인 체제가 확립되지 않았음을 자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경제활성화가 이유라면 노동자를 사면하라
사실, 경제 활성화를 위해 사면을 해야 한다면, 노동자 사면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감옥에 있는 노동자들을 일터에 복귀시키거나 노동자들의 벌금 부담을 덜어준다면, 이로 인한 생산성 증가는 단기간에 가시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뇌물공여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비롯한 재벌총수들이 1997년 개천절 사면을 받았을 때였다. 이때 '경제회생을 위해 재벌 회장들은 사면하면서 노동자들은 왜 사면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한 전직 안기부장(국가안전기획부장·국정원장)이 있었다.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출신의 재선 국회의원인 박세직(1933~2009)이 바로 그이다. 그해 10월 27일자 <한겨레> '구속 노동자는 왜 사면 안 하나'는 이렇게 보도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들어 있는 박세직 의원(신한국당)은 올 노동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국민적 대통합 차원에서 구속된 노동자들이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동부 장관은 대통령에게 이들의 대사면을 건의할 용의는 없느냐'는 내용의 서면 질의서를 냈다.
대통령이 경제 활성화를 위한 격려 차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재계 인사들에 대한 특별사면을 단행한 만큼, 이런 국가적·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구속된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실제 발생한 사실관계와 법정에서 인정되는 사실관계가 100% 일치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변호사나 검사의 능력 혹은 수완에 따라, 또 법리 공방의 전개 양상에 따라 두 사실관계의 차이가 벌어질 수도 있다.
재벌총수들은 유능하고 명망이 높을 뿐 아니라 재판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호인단을 어렵지 않게 구성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총수가 피고인이 된 재판에서는 두 사실관계의 차이가 벌어질 가능성이 더 커지게 된다.
그런데도 재벌총수가 유죄 선고를 받았다면, 이는 범죄가 확실할 뿐 아니라 죄질도 상당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재판부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유죄 선고를 내렸을 이런 사안에 대해 행정부 수반이 경제 활성화를 명분으로 사면권을 행사한다면, 정의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은 한층 더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죄 선고를 받아야 할 사람이 재판 단계에서 무죄로 풀려나도 정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지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사면을 받고 풀려나는 경우에도 그런 신뢰가 크게 떨어진다. 명백하게 유죄로 인정된 사람이 재벌총수라는 이유만으로 사면을 받고 풀려난다면,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지배하며 국가가 가진 자를 편드는 사회적 모순이 한층 명백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평범한 사람들의 박탈감은 어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