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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되고 없지만... 그림으로 남은 '공제의원'의 사계

공주 이미정갤러리에서 열린 화가 류동현의 '다시 오다' 전시를 보고

등록 2021.06.10 09:32수정 2021.06.1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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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안의 건물이 2006년 철거된 '공제의원'이다. ⓒ 공주원도심역사문화연구회

 
공주기독교박물관 옆에는 공제의원(公濟醫院 1927~1988)이 있던 자리를 알리는 안내석이 세워져 있다. 공제의원은 독립운동가이자 공주시 양의사 1호 양재순(梁載淳 1901~1998) 원장이 세운 공주지역 최초의 서양식 진료 의원이다. 공제의원은 2006년 철거돼 그곳을 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된다.
 

소모임에서 화가 류동현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 기거했던 '공제의원'에 대해 설명했다. ⓒ 박진희

 
2019년 여름, 작은 모임에 나갔다가 우연히 공제의원에서 10여 년을 살았다는 한 인물을 만났다. 그가 화가 류동현이다. 당시 그는 휴대전화에 저장된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며, 그곳에 정착하게 된 사연과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여러 에피소드를 풀어 놓았다. 그 덕에 호기심에 가득 찼던 일행은 뜻하지 않게 흔적 없이 사라진 공제의원을 추억하게 됐다.
 

류동현의 작품 '봄-소리없이 다가서다'이다. ⓒ 박진희

 

류동현의 작품 '여름-바라보다'이다. ⓒ 박진희

 

류동현의 작품 '가을-또 한 번 가다'이다. ⓒ 박진희

   

류동현의 작품 '겨울-꿈이 내리다'로 화폭에 담긴 눈은 실제의 눈을 촉매로 하여 미학적 가공 작업을 거쳐 꿈을 표현하는데 최적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 박진희

 
그리고 2021년, (재)공주문화재단에서 주최하고 이미정갤러리에서 주관하는 류동현의 '다시 오다 展(2021.05.21~06.06)'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휴대전화로 감상했던 그의 작품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전시장으로 달려갔다.

이번 전시작 중 특히 관심이 집중된 것은 공제의원의 사계를 담은 4점의 그림이었다. 2000년대 초반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작품을 선보인 이후 십여년 만에 공주에서 올해 처음 사계 작품 4점이 모두 공개된 것이다. 그 때문인지 이번 전시회는 몹시 그리웠던 이와 재회한 듯 격하게 반가웠다.


마침내 화가 류동현이 10여년 간 공제의원을 작업실 삼아 기거하면서 보낸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간과 마주했다. 공제의원에 대한 내 기억 속 네거티브(negative) 이미지와는 상반된 비밀의 시· 공간이 화폭에 옮겨져 있었다.

개나리, 산수유가 핀 봄, 신록의 여름, 단풍 든 가을, 눈 나리는 겨울... 작가는 사실적 묘사를 대신하여 통념적인 계절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창작 의도를 표현한 듯했다. 밝고 긍정적으로 축적된 작가의 경험이 극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어쩌면 2019년 소모임에서 그가 휴대전화로 보여준 그림에 금세 홀린 연유일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비어 있다 보니,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던 공제의원이다. 병원만이 가진 부정적 이미지까지 더해져 근처에 가는 것조차 꺼리던 나와는 많이 달랐던가 보다. 사계를 담은 그림마다 달과 별 그리고 빨간 의자와 친구 같던 백구도 함께 머물러 있었다.

작가는 빨간 의자를 '그리움'의 회화적 표현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던 이들을 언제든 맞이하고팠던 작은 공간인지? 간절함을 이입한 사물과 색채의 선택인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자세히 묻지는 못했다. 그저 막연히 류동현 작가는 공제의원에서 평온한 시간 속을 유영한 게 아닐까 짐작만 했다.
 

류동현의 작품 '여름-정원에서'이다. ⓒ 박진희

 
강아지풀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 '여름-정원에서'는 작가의 말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힐링 포인트를 잘 잡은 풍경화 정도로 여기고 지나쳤을 것이다.

류동현은 가까스로 공제의원을 거처로 정하면서 적적할까 봐 백구 한 마리를 키웠다고 한다. 작품 '여름-바라보다'를 끝낼 즈음, 늘 그와 함께 했던 백구는 누군가가 일부러 놓은 제초제를 먹고 강아지풀이 깔린 공제의원 정원에서 죽어갔다고 한다. 백구가 죽고 3일 후 새 집주인으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통첩을 받았다고 하니, 백구의 죽음은 그가 공제의원을 떠날 시간이 임박했음을 암시했던 건 아닐까.


달갑지 않은 더위처럼 '여름-바라보다' 작품을 끝내고 그는 공제의원을 등지고 새로운 둥지를 찾아야 했단다. 딱 이맘때쯤이려나... 새 보금자리는 1936년에 지어진 정사각형 구조의 건물이었다. 그는 이소한 그곳에 '예술가의 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10여 년간 정을 붙이고 공제의원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새 생명을 불어넣게 된다.

작가 류동현은 낯을 가리는 듯 보였으나, 사람이 그리워 눈 오는 날 거리를 배회하는 인물이었다. 달변가는 아닌 듯 보였으나, 작가 노트는 잘 짜여진 한 편의 단편소설을 읽는 듯 빠져들게 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어느 누군가가 나의 그림을 봤을 때, 뭔가 공감할 수 있는 여지와 한 개인의 흔적들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싶다." -작가 노트 中

그가 보낸 공제의원에서의 10여 년은 그림 속에 박제되었고, 그 그림은 개인적 추억과 경험을 초월해 근대문화유산 안에 화석화 되었다고 생각한다. 화석으로 굳어진 그의 지난 세월의 흔적은 작가의 바람처럼 이 전시를 기다려온 한 관람객에게 크고 작은 파문을 교차시키며 잔잔하게 전해졌다.
#공제의원 #류동현 #이미정갤러리 #근대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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