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인권문화연대 사무실에서 만난 이란주 대표
문세경
경기도 부천 도당동의 '강남시장' 안에 자리 잡은 아시아인권문화연대의 문을 열자 이란주(52) 대표가 반갑게 맞았다. 이란주씨와 나는 '역사와 산'이라는 산악 모임에서 안면을 튼 사이다. 벌써 2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이란주씨와 나는 흰머리가 나풀거리는 중년이 되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요."
안부를 주고받을 새도 없이 흘린 이란주의 첫 마디에 가슴이 싸하게 내려앉았다. 25년 동안 이주민 관련 활동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주민들과 동고동락 하는 삶을 선택한 것일까. 궁금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다 물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는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1994년, <한겨레 21> 창간호에 '외국인노동자피난처' 라는 단체의 활동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어요. 그 기사를 보고 그해 가을에 피난처에 찾아갔어요. 당시만 해도 '이주민'이라는 단어조차 없을 때 였어요. 그런데 이 단체의 활동으로 이주노동자 이슈가 사회적으로 퍼지게 됩니다. 그래서 지역마다 이주노동자 지원 활동이 시작됐고, 부천 지역 활동에 제가 결합하게 됐어요. 피난처에 찾아갔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서게 된 거죠(웃음)."
외국인노동자피난처는 1994년도에 산재 당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적용해 달라는 투쟁을 한다. 마침내 싸움에서 이겼지만 치료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 노동자들이 있었다. 활동가들은 그 이주노동자들을 찾아 나선다. 외국인노동자피난처는 국내 활동을 쉬게 되고, 이란주는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에서 일 할 때에요. 저에게 산업재해 문제로 처음 상담했던 분은 목재 회사에서 일했던 방글라데시 사람이었어요. 한 손이 기계에 눌려 못 쓰게 된 상황이었어요. 사업장은 상시노동자가 5인 이상이라는 점을 입증하지 못해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적용이 안 되고 있었어요. 사실은 일용노동자를 많이 썼기 때문에 5인이 훨씬 넘는 사업장이었죠. 사업주도 어떻게든 보상을 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병원비로 많은 돈을 썼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있었어요.
제가 이주노동자와 함께 공장에 찾아갔어요. 사장은 공장 옆에 살림집을 두었는데 공장이나 살림집이나 다 판잣집이었어요. 사장의 아내가 마당에서 목재 부스러기를 태우고 있었는데 저를 보더니 빗자루로 막 때리는 거예요. 이주노동자는 제 뒤에 와서 숨고요. 진짜 황당하죠. 회사와 우리단체가 협력해서 산재 적용을 받게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진척이 없었어요. 그 일이 있던 즈음 이주노동 관련 활동가들이 모여서 이주노동자 보호법을 만들자는 운동을 해요.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을 했어요. 여러 언론사에서 취재를 많이 왔어요. 당시에 농성단에는 역할 분담을 하고 있었어요.
언론 담당, 살림 담당 등등. 저는 살림 담당이었어요. 그런데 선배들이 없는 사이에 조선일보에서 취재를 왔어요. 그 당시에도 조선일보 취재에는 응하지 말자는 약속이 있었어요.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가 집요하게 물어보길래, 제가 '저 아저씨를 봐라. 산재를 당했는데 보상도 못 받고 너무 힘들어 한다'고 투덜거렸지요. 그랬는데 어떻게 취재했는지 다음날 조선일보에 기사가 났고 매우 빠르게 산재 승인이 났어요. 우리가 아무리 산재 적용을 요구해도 안 됐던 일을 조선일보 기사가 해결 한 거죠. 그래서 방글라데시 아저씨는 보상을 받았어요. 조선일보는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언론이지만 좋은 일을 할 때도 있구나 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마웠죠(웃음)."
산재를 당한 이주노동자가 치료와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 본 활동가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물론 지켜만 보지는 않았다. 동분서주하며 어떻게든 보상을 받게 하려고 불철주야 뛰어다녔다. 자주 그 일을 겪는 이란주의 가슴은 타들어 가는 것을 넘어 숯덩이가 된 지 오래다.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진취적이고 굉장히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에요. 제가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 때는 사람들이 다치거나 아파서 치료해야 하는데 돈이 없을 때에요. 이주노동자들이 일 하다가 다쳐서 큰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은 없고, 아무리 모금을 해도 수천 만 원이 드는 병원비를 마련하기는 힘들죠. 건강보험이 안 되니까 어지간하게 큰 수술을 하면 천 만 원이 넘는 건 기본이에요. 그래서 돈 없을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활동이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재미 있을때도 많아요. 무엇보다 각국의 다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이건 이 활동이 아니면 어디서도 맛 볼 수 없는 기쁨이죠. 다양한 나라에서 온 다양한 문화와 사고를 가진 친구들을 한국에 콕 박혀 살면서도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몰라요. 시야가 저절로 넓어지는 것은 덤이고요(웃음). 거기다 이주민들이 워낙 어려운 상황에서 살다보니 볼 것, 못 볼 것 다 봐요. 서로 지지고 볶고 하면서 지내니까 관계가 아주 친밀해요. 원래 가족보다 더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힘든 일이 많지만 배우는 것이 많고 보람된 일도 많기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모든 활동가가 그렇듯이 이란주라고 소진이 오지 않았을까, 도망가고 싶을 때가 없었을까, 외롭지 않았을까.
"도망가고 싶을 때요? 매일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갈 곳이 없어서 못 간 거예요(웃음). 정말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는 주저앉아서 하염없이 울기도 했어요.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줄줄 흐르는 거예요. 출근해서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그냥 터져요. 당시 곁에 계시던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온 자원활동가가 그래요. '너 우울증이야. 치료 받아야 해.' 그래서 이 증상이 우울증인 걸 알았어요.
병원에 갔는데, 제가 의사한테 막 덤벼요. '당신이 뭘 알아야 치료를 해줄 거 아니야'라는 마음으로. 한마디로 오만한 환자인거죠. 약 부작용이 심했어요. 약을 먹을 수 없었죠. 증상이 있으면 출근을 하지 말고 치료하고 쉬어야 하는데 죽어라고 나와서 눈물 줄줄 흘리고 있으니까 옆에 있는 동료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더 심각했던 점은, 어려운 일이 있어서 상담하러 온 이주노동자에게 제가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즈음부터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상담은 피하려고 해요."
필자도 쪽방촌 주민 공동체 활동을 할 때, 주민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판단력이 흐려진 적이 있다.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 매일 술을 마셨다. 그것도 안 되면 아무나 붙잡고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순간적인 모면이었고 상황을 회피하는 것밖에 안 됐다. 어느 날부터 나도 모르게 우울한 감정이 몰려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쉬 변하지 않는 사회는 허탈한 마음이 들게 하고도 남았다. 이란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때의 상황이 잠시 오버랩 되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아픈 모습을 보여주고 상처 받은 마음을 꺼내어 이야기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몇 달 전에 한 인터뷰 제안을 거절하고, 두 번째 제안을 했을 때야 마지못해 수락한 심정을 이해할 만 했다. 그럼에도 필자는 질문을 하고 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주민의 삶을 보여주고, 이주 활동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주민과 공존을 고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