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키치의 개념을 확장시킨다. 키치는 19세기 중엽 독일 부르주아 중산층이 상류층의 삶을 동경하며 지녔던 싸구려 복제 예술품을 칭하는 용어였는데, 그 의미는 점차 확장되어 획일화된 이념, 다양성의 부정, 그리고 우아하게 포장된 관념같은 것에 대한 총칭이 되었다. 쿤데라의 작품 속 두보체크를 연행하고 프라하를 점령한 소련의 행위는 공산주의라는 가치 아래 민주화를 열망하는 체코 국민 개개인의 존재를 말살하며 전체주의적 사고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키치의 사례를 보여준다.
인간은 키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격렬하게 키치에 저항하는 사비나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비나 또한 시대나 상황이 제공하는 핵심적 이미지에 뿌리깊게 매료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키치를 의식하고 그것을 경멸하더라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는다.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키치 속에 살고 있다. 의도하든 의도치 않던 간에 키치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우리의 삶에서 작용하고, 사고에 영향을 끼친다. 오늘날의 키치는 정치의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그러한 키치들은 유력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의 말이나 행태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정치와 사회의 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키치는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그 뿌리를 같이 하기도 하는데, 예컨대 '자유민주주의' 키치, '진보와 보수'키치, '젊은 정치' 키치, '반공과 애국' 키치, '정의와 자유' 키치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정의, 공평, 공정' 키치는 현재 대한민국의 거대 담론을 차지한다. 정치권에서는 연일 공정과 공평을 언급하며 여러 정책, 법안, 의견들을 쏟아내고 있고, 정치인이나 지식인 등 사회의 담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키치 중의 하나인 '능력주의'를 정의공평공정 키치와 결부시키며 여론을 주도하려 하고 있다.
그들은 능력주의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받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공정과 연결시킨다. 전통적으로 '입시'라는 제도를 통해 엘리트를 선발해온 한국 사회에서 주관성이 개입하지 않는 '공정한 시험'을 내세우며 그것이 정의라고 여론을 관철시킨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들이 주장하는 '능력주의'는 합격주의' 혹은 '시험주의'이며, 능력주의라는 키치는 그 속에 내재한 실질적인 내용을 배제하고 외면한다고 말한다.(양승훈 교수의 칼럼 '한국에는 없는 미국식 능력주의', <시사인> 720호)
양 교수는 청년들과 정치권에서 주장하는 '공정'이란 정규직의 울타리(대기업‧공기업)에서 고용과 승급에 법적 보호를 받는 지위 획득, 연공서열제로 정년까지 꾸준히 임금 상승등의 조건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며 전근대 동아시아의 '성안 사람'으로 편입돼 '해자'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지위를 사수하는 것은 능력주의나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능력주의를 외치지만 정작 월스트리트의 트레이더나 구글의 개발자처럼 성과를 못 내면 당장 해고 당하는 자리에 놓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능력주의'와 '공정'이라는 키치는 그 경쟁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을 배제한다. 하위85~90%의 노동시장 및 입시지장에 위치한 청년들, 노동자들을 고려치 않는다. 양 교수의 칼럼은 여전히 중견기업 이하 절대다수 업체들은 공채로 필기시험을 보지 않으며, 직무급은 고사하고 최저임금+알파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우리 사회가 애타게 부르짖는 능력주의와 공정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을 지적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6장[대장정]은 스탈린의 아들 야코프의 수용소에서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신의 아들이라 일컬어졌던 그는 포로 수용소에 갇혀 고작 똥 때문에 갈등을 빚다 결국 고압 철조망에서 생을 마감한다. 쿤데라는 똥이라는 가벼움을 부정하며 철조망에서 사망한 야코프의 죽음을 전쟁이라는 광범위한 바보짓 중 유일하게 형이상학적인 죽음이라 평가한다.
능력주의와 공정이라는 가치 뒤편의 이야기는 신의 아들이라 불리었던 사람을 수용소 철조망에서 죽게 하는 똥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키치는 똥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고, 똥과 대비되는 아름다운 것을 강조하므로써 그 가치를 유지한다. 양승훈 교수의 칼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집중하고 다시 바라봐야 할 것은 '똥'임을 말해주는 것 같다. 똥이 외면받는 키치 속에서 대중으로 하여금 능력주의와 공정 키치의 거짓을 인식함으로써 비-키치화 시키고 권위를 상실한 키치를 그저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끔 하는 것.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 필요한 것이다.
양승훈 교수의 칼럼은 "그러니 우리는 개념들을 엄밀하게 작동시켜 새로운 정치를 재조직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범생'들이 말하는 '공정'이라는 말, 평론가들이 말하는 '능력주의'는 개념의 관성적인 정의를 전복시키고 새로 구성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마무리된다. 양 교수의 말처럼 아름다움에만 쏠렸던 관심과 시선이 우리가 그토록 외면했던 '현실'이라는 똥으로 향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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