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와 오사카를 오갔던 일본배 기미가요마루(위)와 제주도민들이 돈을 모아 산 배로 일본배 대신 제주도와 오사카를 왕래하는 데 이용됐던 배 복옥환(아래).
시민4.3아카데미 강의자료에서
제주와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많은 제주사람들이 일본으로 갔고, 오사카 지역에 특히 많이 거주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제주와 오사카를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기미가요마루였다.
이 배가 제주사람들을 실어 날랐는데 승객이 많아 돈을 많이 벌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왜 우리가 일본 여객선을 타고 가야 하는가. 그들의 배만 불려줄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배를 마련해 이용하자"는 여론이 형성됐고, 결국 자금을 모아 선박을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이 대목을 들으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제주인의 단결력과 저항의식을 조금은 알 수 있을 듯했다. 이렇게 십시일반 제주인들의 성금을 모아 마련한 배가 복옥환이었다. 이 배가 제주항·애월항·모슬포항·서귀포항 등으로 한바퀴 돌면서 승객들을 실어 일본으로 향했다고 한다.
이렇게 제주-오사카 정기여객선이 호황을 누릴 만큼 수요가 많았던 것은 1920년대 오사카에 중공업이 크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공장노동자를 가까운 제주도에서 충원한 것이다. 1930년대 중반 제주도 인구가 20여 만 명이었는데, 이중 5만 명의 제주인이 일본에 갔다고 하니 한 집에서 1명꼴로 간 셈이다.
제주인들이 대거 오사카 지역으로 갔고, 또 해방 후 앞다투어 귀환하면서 제주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당연했다. 일본에서 생활한 제주인들 가운데는 대학졸업자도 많았다. 또 당시 세계의 새로운 사상 조류로 대두한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높은 사회의식을 지니게 된 제주사람들이 대거 해방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들이 막상 귀국해보니 일장기가 성조기로 바뀌었을 뿐 도탄에 빠진 민중의 생활상과 사회적 모순은 여전했다. 날이 갈수록 저항의식이 높아만 갔고, 마침내 4·3으로 폭발하게 된 것이다.
당시 제주 사회에 불어닥친 변화 가운데 괄목할 만한 것 중 하나가 높은 교육열이다. 해방 후 2년 내 제주도에 신설된 학교가 초등학교 44개교(학생수 2만→3만 8천 명), 중등학교 10개교(학생수 3백→3600명)에 달할 정도였다.
1947년 미군정청 조사에 의하면 소학교 이상 졸업생 비율이 전국 15개 중소도시 중 가장 높았다. 북제주 35.7%, 다음으로 창원 26.7%, 강릉 25.6%, 울산 23.8% 등의 순이다. 제주올레 길을 걷다 보면 마을 입구에 세워진 공덕비를 가끔 만나게 되는데, 읽어보면 상당수가 일본에 갔던 아무개가 돈을 벌어 학교를 설립했다거나, 무슨 훌륭한 기여를 했다는 내용이다.
절멸의 위기
이밖에 4·3아카데미를 통해 제주도라는 섬이 절멸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해방 직전의 아슬아슬한 상황을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군은 규슈나 제주도를 거쳐 일본 본토를 공략한다는 전략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에 일제는 제주도에 일본군 7만을 주둔시켜 결사항전 태세를 갖추고 온갖 대비책을 강구했다. 저 유명한 가미카제 특공대뿐 아니라 어뢰정으로 적의 군함에 박치기 하는 자살공격, 그리고 제주도민 수십 만 명을 동원해 한라산과 오름에 굴을 파고 유격전을 벌이는 등의 옥쇄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판 수많은 동굴진지의 본부가 어승생악으로, 한라산 등반로 가운데 하나인 어리목 부근에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제가 미군과의 결전을 1945년 9월 중순경으로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제의 항복이 한 달만 더 늦었더라도 제주도 전역이 초토화됐을 것이고, 제주도 사람들도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에 의한 학살이나 집단 자결로 희생된 민간인이 12만 명에 달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제주도가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오늘 시민 아카데미 마지막 수업은 4·3 유적지 현장답사다. 버스를 타고 제주시내에서 가까운 4·3 현장을 다녀왔다. 처음 찾아간 곳은 관음사 뒤편 야트막한 야산. 한라산 백록담으로 통하는 바로 그 등산로 부근이다. 돌무더기로 참호를 만들어 총격전을 벌였던 곳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