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인천에는 개항이후 많은 서양문물들을 최초로 받아들였다. 현재는 새롭게 복원되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도 인천에 들어와 있었다.
운민
그 인천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시계를 앞당겨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의 건국신화의 내용에 따르면, 어머니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처로 들어가 왕자로 대접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비류, 온조 두 형제는 이복형인 유리가 찾아오자 그들만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한강 유역까지 남하했다.
하지만 운명을 함께 했던 형제도 의견이 갈려 각자의 왕국을 건설했다. 그중 비류가 문학산 기슭에 미추홀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미추홀이 바닷가라 짜고 습해 농사를 짓기 부적절했고 이후 자연스럽게 온조가 세운 위례성, 훗날의 백제에 병합되었다고 한다.
이후 인천은 시대를 거치는 동안 그 이름을 바꾸며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고려시대 이자겸 세력이 득세하면서 전환기를 마련했다. 그는 바로 인천을 본거지로 하는 인천(경원)이씨기 때문이다.
부평(또는 부천)의 속현이었던 인천은, 이자겸의 이모 인예 태후가 숙종의 모후가 되면서 경원 군으로 승격됐다. 그 후 이자겸의 딸 문경 태후가 인종을 낳은 것을 계기로 인주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인주를 인천이란 명칭으로 고치고, 지금의 관교, 문학동 일대를 중심으로 인천대 도호부를 세움으로 이 일대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인천이 개항되면서 제물포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새로운 도시를 만들게 되면서 관교동은 구읍으로 전락했다. 물론 1995년 인천광역시청이 관교동 일대로 오게 되면서 다시 인천의 번화한 거리가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인천 편을 이어가면서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현재 인천을 대표하는 아이덴티티가 녹아들어 있고 매력적인 관광 명소가 넘치는 동구, 중구 일대를 시작으로 그 포문을 열고자 한다. 우선 인천 구도심의 수많은 포인트 중에 우리가 먼저 가봐야 할 곳은 연안부두다.
차이나타운, 월미도, 신포시장 등 주목받는 장소가 많은데 왜 연안부두냐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안부두야말로 인천의 삶과 애환이 압축적으로 녹아들어 간 그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곳이라 할만하다.
인천 앞바다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커 크게는 10m까지 차이가 난다. 덕분에 갯벌이 드넓게 조성돼 수산물을 쉽게 획득할 수 있지만 항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이 바로 독(dock)이다. 이 시설을 설치하면서 늘 일정한 수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인천은 항구도시로서 본격적인 기지개를 켜게 되었다.
그 시설 중 외항에 위치한 연안부두는 1979년 김트리오가 부른 <연안부두>를 통해 더욱 알려졌다. 특히 야구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문학구장에서 울려 퍼지는 응원가로 뇌리에 깊게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현재 연안부두는 인천의 각 섬들을 이어주는 여객터미널이 있으며, 인천 최대의 어시장도 자리한다.
특히 밴댕이 회 무침 거리가 있어 적당한 가격에 한상 가득한 백반을 함께 즐길 수 있으니 한 번쯤 올 만한 곳이다. 그러나 연안부두에는 몇 가지 독특한 조형물이 눈에 띈다. 우선 연안부두 한복판에 있는 넓은 광장이 바로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의 명칭을 본뜬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이다.
러시아와 연안부두의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