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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덕의 아버지와 현숙한 어머니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2] 6형제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등록 2021.08.09 19:58수정 2021.08.0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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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공 신익희 선생
해공 신익희 선생눈빛출판사
 
1894년 7월 11일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 67번지 속칭 사마루 마을에서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64세의 평산신씨 신단(申檀)이고 어머니는 세 번째 상처 뒤 네 번째 부인으로 들어온 동래정씨 경랑(敬浪)이다. 평산신씨의 시조는 왕건을 도와 고려건국의 1등 공신이 된 신숭겸 장군이고 고려ㆍ조선왕조 1000년간 명문거족으로 알려진다.

신단은 구한 말 장례원경(掌隷院卿)으로 출사하면서 거듭 상처하고 젊은 여성 동래정씨를 후처로 맞아 둘째 아들을 보았다. 신익희가 태어난 것이다. 사마루는 그의 증조부가 강원감사로 있을 때 자기 아버지의 봉양을 위해 집을 지으면서 4, 5대에 걸쳐 살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신익희 선생의 생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신익희 선생의 생가가 광주에 자리잡고 있다. 신익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요인이었고, 우리나라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신익희 선생의 생가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신익희 선생의 생가가 광주에 자리잡고 있다. 신익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요인이었고, 우리나라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운민
 
신익희는 본래 6형제였다. 큰어머니인 풍양조씨 소생의 보희(輔熙)가 맏형이나 아버지의 형에게 양자로 입양되고, 세 번째 어머니 전주이씨가 낳은 규희(揆熙)ㆍ필희(弼熙)ㆍ정희(庭熙) 3형제가 있었다. 정희가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잃게 되자 아버지는 어머니인 동래정씨를 맞아 위로 재희(宰熙)에 이어 신익희를 낳게 되었다. 6형제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신익희는 나이든 아버지와 젊은 어머니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건강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문장에 능하고 덕망 있는 유지였다. 학덕이 넘치며 해금에도 조예가 깊어 칭송을 받는 신판서였다. 한편 어머니는 여장부의 기풍을 겸비한 현숙한 부인이었다. 해공은 아버지의 원숙한 교훈과 학식이 뛰어난 백형(伯兄) 규희에게서 글을 익히며 자랐다.

특히 백형 규희는 보학(譜學)에 능한 선비로 진사를 거쳐, 지금의 구청장에 해당하는 동부도사(東部都事)를 지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시골의 숨은 학자였다. (주석 1)

신익희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와 백형으로부터 공부와 훈도를 받으면서 성장한다.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으로 나라 안팎이 소연했지만 그가 자라는 지역은 아직 평온한 상태에 있었다. 자신이 회고하는 소년기 배움의 과정이다.

백형(伯兄)님의 글이 웅문거벽(雄文巨擘)이었으나, 갑오경장 후로는 과거제도가 없어졌으므로 그 때에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으므로 주로 살림을 맡아 하면서 그 때 시골 서향세족(書香世族)에 흔히 있는 일로 가숙(家塾)을 설치하고, 우리 형제ㆍ숙질ㆍ사촌ㆍ육촌ㆍ인척 아이들이며, 과갈지친(瓜葛之親)의 자질(子姪)들을 데리고 글을 가르쳤다.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에 위치한 동상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에 위치한 동상박정훈
 
나는 다섯 살 때에 그 백형님에게 비로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날 배운 글을 이튿날 아침 암송하는 일과인데 나는 <천자문> 한 권 모두 떼는 데 있어서 외우지 못하여 종아리 맞아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한편 내 조카 정균(鼎均)은 두서너 번 종아리를 맞는 것을 보았다. 나나 조카나 똑같이 배우면서 나는 죽죽 내리 외우는데 내 조카는 끙끙거리며 외우지 못할 때는 종아리를 휙휙 때리셨다. 맞는 아들은 아파서 울고, 때리시는 아버지 되시는 큰형님께서는 분하기도 하시고 애처롭기도 하셔서 부자분이 같이 우시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래도 십여 명을 가르치시는데 나하고 내 조카 정균이 그 중 두각이 드러났었다.


나는 번번이

 "잘 외웠다. 참 잘 읽었다."

등등 칭찬을 늘 들었는데 다른 아이들 가운데는 이틀 사흘을 두고 외우지도 못할뿐더러 읽지도 못하는 아이가 있을 때에는 책을 앞마당으로 훌훌 내던지시며 화를 내시면서 펄펄 뛰시는 것 뵈오면 큰형님께 동정도 가더라. 남이 아닌 내 동생 내 아들 내 조카들이기에 좀더 많이, 좀 더 잘 가르치시려 힘쓰시던 소이연(所以然)이다. (주석 2)


주석
1> 유치송, 『해공 신익희 일대기』, 65쪽, 해공 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 1984. 
2> 「구술 해공 자서전」, 신창균 저『해공 신익희』, 46쪽, 해공 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 1992.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해공 #신익희평전 #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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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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