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신익희 선생의 생가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신익희 선생의 생가가 광주에 자리잡고 있다. 신익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요인이었고, 우리나라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운민
신익희는 본래 6형제였다. 큰어머니인 풍양조씨 소생의 보희(輔熙)가 맏형이나 아버지의 형에게 양자로 입양되고, 세 번째 어머니 전주이씨가 낳은 규희(揆熙)ㆍ필희(弼熙)ㆍ정희(庭熙) 3형제가 있었다. 정희가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잃게 되자 아버지는 어머니인 동래정씨를 맞아 위로 재희(宰熙)에 이어 신익희를 낳게 되었다. 6형제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신익희는 나이든 아버지와 젊은 어머니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건강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문장에 능하고 덕망 있는 유지였다. 학덕이 넘치며 해금에도 조예가 깊어 칭송을 받는 신판서였다. 한편 어머니는 여장부의 기풍을 겸비한 현숙한 부인이었다. 해공은 아버지의 원숙한 교훈과 학식이 뛰어난 백형(伯兄) 규희에게서 글을 익히며 자랐다.
특히 백형 규희는 보학(譜學)에 능한 선비로 진사를 거쳐, 지금의 구청장에 해당하는 동부도사(東部都事)를 지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시골의 숨은 학자였다. (주석 1)
신익희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와 백형으로부터 공부와 훈도를 받으면서 성장한다.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으로 나라 안팎이 소연했지만 그가 자라는 지역은 아직 평온한 상태에 있었다. 자신이 회고하는 소년기 배움의 과정이다.
백형(伯兄)님의 글이 웅문거벽(雄文巨擘)이었으나, 갑오경장 후로는 과거제도가 없어졌으므로 그 때에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으므로 주로 살림을 맡아 하면서 그 때 시골 서향세족(書香世族)에 흔히 있는 일로 가숙(家塾)을 설치하고, 우리 형제ㆍ숙질ㆍ사촌ㆍ육촌ㆍ인척 아이들이며, 과갈지친(瓜葛之親)의 자질(子姪)들을 데리고 글을 가르쳤다.